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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Jan 21. 2024

귤냄새

오랜만에 셔틀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전날 퇴근 후 몇몇 회사 동료들과 회사 앞 식당에서 술자리가 있었다. 마치고 나오는 시간이 마침 셔틀버스 시간과 맞아서 차를 회사 주차장에 두고 갔다. 6시50분 셔틀을 타기 위해 평소보다 30분 일찍 일어났다. 출근 준비를 하고 서둘러 집을 나오는데 식탁 위에 귤 더미가 눈에 띄였다. 얼른 두 개를 집어 양쪽 주머니에 하나씩 넣었다.

 회사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면서 주머니 한 쪽의 귤을 꺼냈다. 귤 아래 중간 부분을 손톱으로 눌러 틈을 만들었다. 손가락을 그 틈에 비집고 넣어 껍질을 벗겨냈다. 귤의 껍질에 틈이 생기자마자 안에 갇혀있던 냄새가 터져 나왔다. 내 코로 들어온 귤의 냄새는 내 머릿속까지 전해졌다. 아직 귤을 입에 넣지도 않았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탱글탱글 귤 알맹이가 터지고 있었다. 

 귤 알맹이를 입안에서 톡톡 터트리고 있는 곳은 기차 안이었다. 다섯 살? 아니면 여섯 살? 기차안에서 귤을 까먹고 있었다. 귤은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냄새를 풍겼다. 기차 안에 귤의 냄새가 가득 찼다. 귤 껍질을 귤과 분리해낼 때 나는 부드러운 소리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귤의 두꺼운 바깥 껍질을 분리해내고 나면 바깥 껍질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하얀 속껍질이 군데 군데 남았다. 속껍질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결을 따라 하얀 껍질이 끊기지 않게 떼어내려고 애썼다. 한참을 공들여 작업을 하고 나면 때를 벗긴 알몸같은 오렌지빛 맨 살이 된다. 서로 맞닿아 붙어있는 여러 개의 속 알 맹이 중에 하나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가끔 같이 맞닿은 알맹이의 투명한 껍질이 따라와 떨어졌다. 그러면 투명한 껍질 안에 알알이 모여있는 알맹이가 반짝거리며 드러났다. 아주 작은 물방울 모양이었다. 작고 반짝이는 알맹이를 하나 입안에 넣었다. 그 조그만 알맹이도 나름, 아니 오히려 더 단단하게 탱글탱글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그 단단함이 내 입안에 들어가 톡 터지는 것이었다.

 귤은 기차 안의 역무원 구루마에서 엄마가 사주셨을 것이다. 부모님의 과수원이 있는 경기도에서 대구 할머니댁으로 가기위해 엄마와 기차를 탔던 것 같다. 보통은 아빠의 트럭을 타고 가는데 그 날은 무슨 일인지 아빠는 없이, 엄마가 동생과 나를 데리고 기차를 탔다.

 아빠에게는 2인승 1톤 트럭이 있었다. 과수원을 하면서 과일 상자나 부피가 큰 짐들을 운반해야 하는 일들이 많으니 필요에 의해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빠, 엄마, 언니 둘과 남동생 그리고 나까지 6명의 가족이 타기에 그 트럭은 조금 불편했다. 운전석과 보조석, 그리고 그 가운데 일반 좌석의 삼분의 이정도 되는 크기의 애매한 자리가 있었다. 일반 의자처럼 폭신하지 않고 딱딱했다. 그 때는 그게 의자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잡동사니를 두는 곳이었던 것 같다. 좌석 뒤쪽에 좁은 실내 트렁크가 있었다. 깊이가 30센치정도 되려나. 아빠가 운전석, 엄마가 보조석에 앉고 나면 중간 자리에 누군가가 불편한 자세로 앉았다. 4명이 타게 되면 실내트렁크에도 한 명이 탔다. 5명일 때는 트렁크에 두 명이 끼어 탔다. 6명이 모두 타려면 엄마의 무릎도 의자가 되었다. 다행히 6명이 모두 함께 타는 일은 드물었다. 우리 가족은 다 함께 살았던 적이 없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큰 언니가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대구 할머니댁으로 갔기 때문이다. 

 나는 기차를 타는 것이 신났다. 불편한 아빠의 트럭 중간 자리나 실내 트렁크가 아닌 기차의 폭신한 의자들 중 하나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다.

 기차 안 구루마가 지나갈 때마다 눈이 커지고 침이 꿀꺽 넘어갔다. 몇번이나 그냥 보내버리더니 드디어 엄마가 구루마를 세웠다. 어떤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구루마 안을 재빠르게 둘러보았다. 최선의 선택을 해야 했다. 엄마가 하나만 고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빨간색 그물망에 일자로 가지런히 놓여져있는 귤을 골랐다.

 우리 집은 사과 과수원을 했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데다 사과 과수원까지 하고 있었으니 나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과일은 90% 이상이 썩거나 흠이 있어 상품성이 떨어지는 사과였다. 흠과가 더 맛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도 썩은 내가 사과에 남아있었다. 훔과도 아까워 썩은 부위 최대한 가까이 도려내어 먹었다.

 아빠가 장남이라 우리 집에서는 일년에 열번이 넘는 제사상이 차려졌다. 제사상이 차려지는 날이면 사과가 아닌 다른 과일을 먹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귤이 인기가 좋았다. 크고 예쁜 귤을 시장에서 사오면 깨끗하게 물에 씻어 껍질 윗부분의 절반 정도까지 피자조각을 내듯 칼집으로 여섯 조각 선을 긋는다. 껍질을 칼집이 난 자리대로 조심스럽게 벗겨 안으로 둥글게 말았다. 둥글게 말린 여섯 조각의 껍질이 꽃잎처럼 귤 알맹이를 감쌌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반쯤 껍질이 벗겨진 귤은 조금 건조해졌다. 

 그 날 기차 안에서 맛보았던 귤은 제사상에 올랐던 귤보다 훨씬 달콤하고 고급졌다. 제사상의 귤은 보기 좋으라고 크기가 큰 것만 골랐다. 기차에서 파는 귤은 대여섯 살 아이의 주먹만한 크기에 훨씬 말랑했다. 건조하지도 않았다. 얼굴이 찌푸려지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새콤하면서 달콤했다. 소중한 알맹이를 하나씩 천천히 입에 넣었다. 

 푹신한 기차의 의자에 앉아 입속에서 말랑한 귤 알맹이를 터트리는 그 날의 사치를 떠올리며 사무실 내 의자에 앉아 귤 하나를 입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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