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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Oct 03. 2022

당신을 심연에서 건져줄 튜브는 무엇인가요?

소설 <튜브>를 읽고

언제부터인가 대중문화 컨텐츠의 결말들이 드라마틱한 사회적 성공, 완벽한 해피엔딩에서 조금씩 비켜나기를 선호하는 것 같다. 개천 용이 사라진 사회, 계층 이동이 둔화된 사회의 현실감을 반영한 측면이겠지만, ‘삶’을 기대하는 대중의 관점이 달리진 점도 있을테다. 사랑하는 이와의 결혼 골인, 원하던 커리어로의 구직 성공, 전력 매진하던 성과목표치의 달성이 결코 우리 삶의 결말일 수는 없기에, “해피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는 것을 알기에.      


성취와 승리의 순간에 시간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 화양연화의 순간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는 것은 인생의 심술궂은 측면이다. 때론 인색한 행운 뒤 후한 불운, 짧은 비상 후 긴 추락을 견뎌야 할 때도 있다. 빛나던 성공의 경험을 아로새긴 채 긴 불행의 터널을 인고하며 통과해내는 강인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우리는 연거푸 덮치는 실패들 속에서 바래고 퇴화되어 버린다. 나도 한 때는 분명 호기심 넘치고, 자신감 충만한 눈부신 청춘이었는데, 출근 길 쇼윈도에 비친 나는 피곤에 절어 만사가 시들해진 ‘노잼’ 회사원일 뿐이다. 매일매일을 지우듯(해치우듯) 살아가고 있는 나를 보노라면, 그야말로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씁쓸하기 그지없다. “니가 알던 나는, 이제 나도 몰라...”     


소설 <튜브>의 주인공 '김성곤 안드레아'는 그런 점에서 나와(혹은 당신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그이 생의 깊은 굴곡과 절박함을 감히 잔잔바리 내 인생에 비할 순 없지만, 옛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이 당혹스럽고 불가능하게 느껴진다면 같은 출발선에 서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사진 속 자세라도 닮아보고자 낑낑대며 일일 셀카를 찍는 그의 모습에 결코 웃을 수 없었다.     


삶을 포기하려던 계획조차 실패했던 그에게 이것은 마지막 도전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은 절망 속에서 간신히 붙잡은 지푸라기. 숱한 자기계발서가 찬양했으나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그것 - 나를 변화시키는 작지만 꾸준한 시도. 다행히 누적된 시간은 정직하게 몸에 쌓였고, 그 변화는 스스로 전진하는 동력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영감이 된다. 잇따른 사업실패로 해체위기에 놓인 가족의 봉합, 방향없이 부유하던 팝(Pop) 애호가의 도약, 스스로를 방에 가둔 은둔 청년의 세상과의 조우, 그리고 급기야 자신이 동경하던 기업가 글랜 굴드의 투자 유치까지. 갑자기 온세상이 그의 ‘지푸라기 프로젝트’를 칭찬하며  영웅대접 한다.    

 

하지만 ‘사고처럼 다가온’ 그 행운은 그리 길지 않았다. 모으고 쌓아올린 것들은 다시 무너지고 흩어졌다. 더 깊은 나락에 빠진 그는 더욱 처절히 낙담한다. 치열했던 변화의 노력도 헛수고가 된다면 대체 무엇을 바라며 산단 말인가. 삶에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작가는 유치원 운전수 '박실영'의 입을 통해 답한다. 어떤 삶도 그저 엉망이기만 한 삶은 없으니 과거를 몽땅비관하지는 말라고, 다시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라고,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애쓴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그 정도면 그럭저럭 잘 산 인생이라고... 그의 따뜻한 말에 김성곤 안드레아는 쓰러진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일어서보기로 다짐한다. 자신 또한 넘어진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소설 속 ‘지푸라기 프로젝트’는 각자의 작은 도전을 불특정 다수가 함께 응원하고 실천을 독려하는 시스템이다. 자기 개조를 바랐던 그는 변화에 성공했지만 삶은 다시 그를 침잠하게 만들었다. 이번에 그를 건져 올린 것은 그저 한 사람의 ‘영혼이 담긴’ 위로였다. 여럿의 격려가 힘이 될 때도 많지만, 때론 그저 단 한사람의 진심 담긴 인정(그 정도면 충분했어, 이만하면 잘 했어)이 절실할 때가 있다. 인생의 ‘튜브’란 각자가 움켜쥔 힘없는 지푸라기를 서로 엮어 만들 수도 있지만, 간절한 어느 순간엔 그저 단 한 사람이 내민 다정한 손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소설의 전후반부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한 인생 개조’ 스토리 같았는데, 말미에서는 갑자기 ‘삶을 대하는 자세’로 주제가 바뀌었다. 죽어라 열심히 노력해도 삶이 뜻처럼 흐르지 않을 수 있으니, 그때는 그냥 삶을 있는 그대로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걸까. 소설의 마무리가 다소 급작스럽고 어색하다. 아마도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누군가에게 응원이 되길 바라며 쓴 이야기였기에, 아무리 변화하고 애써도 잘되지 않을 독자들의 실망까지 다독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의 의무감에 사로잡힌 이야기는 경직되고 평면적이며 지나치게 교훈적으로 전개된다. 곳곳에서 소설이 아닌 자기계발서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분명 전작인 소설 <아몬드>에 비하면 완성도가 다소 실망스럽다. 급히 쓰여진 이야기처럼 때론 빈약하고 때론 작위적이며 때론 노골적이다. 전작을 워낙 인상 깊게 봤던 터라, 처음 완독한 후엔 그저 혹평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실망을 달래기 위해 다시 읽어보니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소설이 꼭 여운 깊거나, 성찰적이거나, 예리하거나, 비범하게 새로워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저 누군가에게 다정함이 되고픈 글도 있으니까. 

  

이 책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닿아 그를 붙잡을 수 있다면, 두 번째 한강 다리 위에 올랐던 김성곤 안드레아를 위로해 준 박실영의 말처럼, 그저 단 한명의 영혼이라도 껴안아 건져줄 튜브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 책은 제 태어난 소명을 다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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