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술학원을 다니고 싶었다
누군가 H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나요?"
그는 말했다. 별거 없다고. 그냥 노래를 많이 부르고, 내고 싶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그 목소리를 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누군가 "음악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자, T는 "그럼 하세요, 지금부터 당장 곡을 쓰시면 됩니다."
첫 번째는 가수 박효신의 일화이고, 후자는 토이(유희열)의 대답이다. 음악이란 분야에서 최정상을 찍은 두 뮤지션은 자신이 이룬 업적에 대해 정작 본인들은 무덤덤하다. 그저 내고 싶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꾸준히 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원하던 지점에 도달해 있을 거라 담담히 말한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요지는 실행의 중요성이다. 결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당장 도전하는 것. Just do it.
대학에 다닐 때 한 번도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돈은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필요하면 벌어서 쓰면 되는 거라 생각했으니까. 나눔에도 인색하지 않았고, 만원 한 장 아낄 바에는 그 돈으로 영화를 한 편 보자고 생각했다. 적은 비용으로 경험을 살 수 있으니까. 그렇게 나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내어주는 삶을 살다가 졸업을 하고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용돈은 끊겼지, 임용 공부는 해야 하지... 등 떠밀린 것도 아닌데, 모든 것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과거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생전 하지 않던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내가 했던 후회들만 합쳐도 반년 가까이의 시간을 후회로만 흘려보냈다. 허무하게도.
그리고 단 하루라도 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전부터 펑펑 쓰지는 않아도 먹을 것과 여행에는 아끼지 말자는 주의였는데, 그래서 가치관도 '경험'과 '건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임용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후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경험'은커녕 하루 세기를 제대로 다 챙기기에도 벅찬 금액이었다. (그래도 용돈을 주시는 것에는 정말 감사했다) 내가 쓸 수 있는 돈만큼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시야도 좁아져갔다. 임용고시에 집착을 하기 시작했고, 빨리 이 시험을 통과해야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무리하게 공부했다. 내년에는 조금 더 마음이 편해지겠지, 나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겠지 생각하며.
1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오직 미래를 향한 기대 하나로만 달려왔던 것 같다. 물론 그 사이에 현재를 느끼기도 했지만, 막연한 불안감이 늘 한구석에 존재했다. 돈이 없다는 게 정말 크게 다가왔던 적도 있었고, 없어도 딱히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나날들도 있었다. 결국 돈은 역시 나의 가장 큰 가치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돈은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다는 가벼운 생각을 가지고 마음 편히 살았던 내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돈독한 일기를 처음 쓰자고 결심했을 때, 나는 1인분의 삶을 스스로 살고 싶었다. 내가 먹고 내가 쓰는 것만큼은 내 힘으로 하고 싶은데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 식비, 교육비, 독서실비, 보험비, 휴대폰비... 어느 것 하나 내가 내는 게 없다.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는 데에도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는구나를 깨닫고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과 죄송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가족을 부양해내는 부모님에 비하면, 나는 나 혼자만 책임지면 되는데 그게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
경제공부의 결정적 계기는 미술 학원에 다니고 싶었다. 너무 다니고 싶은데, 지금 상황에서 다녀도 괜찮을까. 지금 용돈에서 미술 학원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일주일이나 고민을 했고, 고민에 지쳤던 나는 더 이상은 이런 고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경제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경제 신문을 읽고, 경제 서적을 읽은 지 겨우 한 달이 지났지만 나의 가치관은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당장 다음 달의 미술 수업료를 내야 할 시기가 왔다.
생애 처음 다닌 미술 학원은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그날을 기다릴 정도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내게 행복과 편안함으로 다가왔고,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멋들어지게 그려냈다. 주변 친구들이 알아줄 정도로 미술 광인 나는, 정작 나 스스로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못 했는데 이유도 단순했다. '잘 못할 것 같아서'. 이미 너무 좋은 그림은 많이 있고, 눈높이는 고흐와 모네에 맞춰져 있는데 내가 그린 그림은 그들이 휴지에 끄적인 잉크 자국보다 못할 거야 지레 겁먹고 도전하길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과거에 그림을 그렸던 시절이 생애 딱 한 번 있었는데, 몇 년 전 겨울에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겪었을 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무작정 좋아하는 그림을 따라 그린적이 있었다. 뭉크, 베르나르 뷔페,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들... 그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느꼈던 건 그저 빈 종이에 색을 입히는 단순한 행위로도 기분이 괜찮아질 수 있구나. 훌륭한 그림들을 보고 느끼는 전율만큼은 아니더라도 내가 그리는 이 행위 자체가 큰 위안을 준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난 늘 기준이 너무 높았다. 터무니없이 기준이 높아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제대로 하지 못할 거라면 시작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 왜? 왜 하면 안 되지? 지금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설사 잘하지 못하더라도 좋아하고 즐기고 있는데 왜 하면 안 되는 걸까. 생각이 들었다. 왜 스스로 만든 한계의 벽에 나를 가둘까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게 두려워서? 그게 왜? 뭐가 무서워서? 인생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데.
그렇게 미술 학원에 한 달 더 다니기로 결정했고, 고흐의 방을 그리며 행복을 느끼고 나는 생각했다. "계속하고 싶다." 절실히 느꼈다.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가장 필요한 게
그리고 생각은 결심이 되었다. "돈을 벌어야겠다."
<100만 원으로 창업하기>는 곧 출시 예정인 '제인앤오스틴 수제 그래놀라'의 창업스토리를 담을 예정입니다. 창업을 진행하면서 겪는 우여곡절 이야기들을 최대한 가감 없이 진솔하게 담아낼 예정이니 계속 지켜봐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