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어디로 더 나아가야할까의 고뇌와
그와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는 좌절,
남에게 가시를 세우기 전 내 과거를 짚는 관성이
나를 이루고 있다.
그로 인해 따라오는 머뭇거림과 피로, 슬픔같은 것들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는데
어쩌면 주목해야만할 점은,
아니 내가 주목해야한다고 배워왔던 것은
이런 날 것의 내 요소를 사랑해 나의 거친 표면까지도 안아주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고, 그 사랑에는 나의 형태를 뛰어넘는 넘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끔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살아있음을 위하여 희생된 수 천 수 만의 생명을 떠올린다. 나의 포만과 즐거움 이면에 식용으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도축되는 프로세스를 상상한다. 또한 내가 그로부터 나의 사랑하고 따뜻한 친구들과 만들어간 추억을 생각한다.
따뜻하고 편리한 식사
그저 감사한 삶이라 말하기엔 치욕이 더 정의롭지 않은가
내게 이를 뛰어넘는 무한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어떤 자세로 받아들여야할까.
그러니 그로 인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포옹을 하고, 용서를 해내고자 애쓸 것이다. 인간의 역함을 견디고 삼킬 것 이다. 살아서, 살아있다는 폭력을 똑똑히 목도하고, 그에 눈물짓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살아, 나의 모순을 끌어안고, 더 커다란 품으로 너의 모순까지 안는 넉넉한 마음을 소망한다.
그러나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나의 존재의 근원까지 사랑받고 있다는 그 감정을 음미하기 어렵다. 나는 내 행동거지와 말투 따위가 썩 타인에게 거슬리지 않았고, 내가 실상 무의미하나 노력이라도 투자하는 태도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기에 우리가 오늘 이렇게 마주보았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다. 아니 지우기가 싫다. 나는 이 관계에서 나를 지우고 싶지 않다. 그래서인지 필사적으로 나의 이름을 덧쓰고, 반복하고, 되새긴다. 그리고서야 안도한다. 어쩌면 이 구간에서 우리가 보아야할 것은 '날-것의 교만'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소망하는가. 먹어도 먹어도 동나지 않을 육류, 언제든 나의 한끼를 위해 도축되어줄 생명을 소망해야할지. 포만과 영양을 단번에 채워줄 신약이라도 소망해야할지. 혹여나 더럽혀질까, 먹는 계란마다 유정란이니- 무정란이니-를 따져가며 에너지를 쏟는 것이 민망스럽지 않은 세상을 꿈꿔야할지.
다시 소망한다. 나의 엎어짐과 좌절과 교만의 관성도 내려둔다. 어딘가에 반드시 가닿아야한다거나, 유의미를 따지는 어리석음을 포기한다. 다만 이 습기는 금새 사라지지 못 할 것이다. 용기내어 나를 지운다. 모두 지운다는 오만을 떨지 않고, 오늘의 내 생존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정도만.
그러나 나의 소망조차 맞으리라는 확신이 없다. 이것이 인간이다. 희망을 희망이라 부름도 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