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학원 설명회에서 갔다가 원장의 말이 귀에 콕 박혔다. 숙제를 밀린 아이는 그 밀린 숙제를 하느라 그날 나간 숙제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결국 매번 밀린 숙제를 메꾸기만 하는 거다. 거기에 원장은 아이들이 지각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한 아이가 지각을 하면 그 강의실에 있는 아이들의 시간을 모두 빼앗는다고. 원장의 말에 얼마나 뜨끔했는지 모른다. mbti에서 P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는 좀처럼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할 일을 최대한 미루고 마감 직전에 처리한다. 데드라인을 넘기지 않으면 다행인데 넘기는 일들도 많다. 예를 들면 도서관 책 반납을 제대로 못해서 연체가 된다거나 약속 시간에 늦는다거나 하는 일이다. 생각해 보니 책 반납을 제때에 하지 않으면 혹여 그 책을 예약한 사람은 대출을 할 수 없을 테고, 지각을 하면 상대방의 시간을 빼앗는 셈이 된다.
남편을 처음 만난 날에도 난 어김없이 약속 시간에 늦고 말았다. 그날은 일찍 나온다고 나왔는데 검은색 모직 스커트를 입은 게 화근이었다. 벗어놓고 돌돌이로 먼지 제거를 해두지 않았나 보다. 집에서 입었을 때는 몰랐는데 아파트 밖으로 나오자 검은 스커트에 허연 먼지들이 붙어있는 게 눈에 띄었다. 다행히 지하철 안에서 먼지 제거기를 판매하는 잡상인을 만났고, 구입할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가서 먼지 제거를 하느라 시간이 흘러서 약속 장소에 15분 늦게 도착했다. 그 당시 그 남자는 집에 가려다가 참고 기다렸다고 했다. 남편은 나와는 정반대로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다. 인연이 되려니 그날따라 남편이 기다려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나의 반쪽을 만나지 못할 뻔했다.
시간을 지키게 해 달라는 원장의 말은 꽤 큰 자극제가 되었다. 남한테 폐 끼치는 거 싫어하는 성향이면서 게으른 탓에 결국 피해를 주고 있었던 거다. 아이한테는 똑바로 하라며 잔소리하면서 정작 나는 부끄러운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었다. 타인의 대한 배려가 부족했음에 반성하며 앞으로 달라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그동안 연체된 책을 부리나케 읽고 반납했다. 아이들이 숙제를 밀려서 하듯, 사실 책을 밀려서 읽었다. 이제 연체 도서가 없으니 빌린 책을 여유 있게 읽을 수 있다. 그 이후 몇 번의 약속이 있었는데,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나가니 가는 길이 여유로웠다. 장소에 도착해서 상대를 기다리니 마음도 편했다.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고쳐나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