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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PD Jul 31. 2023

영화 속으로..

나에게 영화란...

혹시 기억이 사라질까 정신없이 머릿속에 생각나는 나에 영화 이야기를 쏟아 내고 나니 참 두서없이 이야기를 한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 영화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참 예 뜻하다. 친구들이 첫사랑을 이야기할 때 참 예 뜻하는구나 아직 잊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영화스텝으로 써에 삶은 나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아직도 아련하고 생각이 난다. 결론적으로는 내가 판단해서 떠나온 길이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미련이 남아 있는 건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나를 떠난 내가 너무나 사랑한 여인 같은 존재... 나 자신에게 냉정이 이야기해 보면 내가 떠난 것이다. 그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내 인생에 이렇게 그리운 감정이 남아 있는 영화일을 왜 그만둔 것일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역시 제일 큰 문제는 금전적인 이유이다. 나도 나이가 있고 해서 부모님이 참 많은 소개팅(선에 가깝다)을 주선해 주셨다. 요즘 그렇듯이 남자도 여자도 결혼이 늦은 경우가 많은데 부모님 세대에서 보면 얼마나 답답하시겠는가? 나도 비혼주의자는 아니어서 어머니가 주선한 자리를 참 많이 나갔다. 약속을 잡고 나가면 내가 마음에 드는 분도 계셨고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대게 그러하듯이 내가 마음에 들면 여자 쪽에서 나를 별로, 여자 쪽에서 호감을 보이면 내가 별로어서 이루어진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한 번은 여자분도 나도 괜찮다는 호감의 표시가 맞아 전화도 하고 문자도 주고받으면서 잘되는 듯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만 하자는 연락이 문자로 왔다. 오래간만에 마음에 드는 분이라 이 상황이 , 문자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후에 연유를 들을 수 있었는데 내가 영화를 하고 있어 재정적으로 불안하니 만나지 말라는 집안 반대였다고 한다.

그때 내가 좋아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시시 하거나 걱정거리로 보일 수도 있구나 걸 직접적으로 알게 되었고 심리적으로 꽤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둘째 난 영화 PD 쪽잎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면서 들어서게 되었지만 하다 보니 연출 못지않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면서 5년 안에 꼭 PD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PD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지 돌이켜 보면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제작실장 (라이프로듀서라고도 부른다.)을 여러 편 했다. 물론 거의 PD역할도 해내었지만 결국 PD 타이틀을 영화 자막에 올리지는 못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게 후회되는 부분이다. 물론 5년 안에 PD 타이틀을 달지 못한 이유로 영화스텝일을 그만둔 것은 아니다.

세 번째가 결정 적인데 영활을 하면서 현장이 (생태계가) 치열하다 보니 배신, 이용 같은 것도 많이 당했다.

그래서 내가 믿을 수 있는 분을 만나서 열심히 해서 그 안에서 PD로써의 꿈을 키워 보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그런 분을 만났고 사실 내 경력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다. 그렇게 내가 바래던 일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안주했다 그리고 어느 날 너무 허무하게 관계가 끝나 버렸다. 그때는 왜 그렇게 앞을 알 수 없이 캄캄하던지 내가 과연 영화를 계속할 수 있을지 다음을 기약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일을 찾아보니 내가 막상 할 수 있는 일은 운전 말고는 없었다. 그때 조금 넓게 사고를 하고 조급해하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 영화 쪽에 몸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조급함과 불안함에 두 달쯤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중국에서 사업하시는 친척형이 연락이 왔다. 뭐 하냐고 시간 되면 밥을 먹자고. 그래서 밥을 먹고 한국에 무슨 일로 오셨는지 근황을 물었보았다. 그랬더니 중국 쪽 일이 잘되고 있고 한국에 사업을 할 건데 좀 크게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까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와는 다른 일이라 생각했다. 뜬금없이 영화는 잘되고 있냐고 하셔서 요즘 좀 고민이 많다고 대답하고 , 왜 그러냐고 하시기에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그럼 나랑 같이 일할 생각은 없냐고 해서 생각이 있다고 했더니, 여권은 있냐고 해서 없다고 했더니 여권 만들고 중국비자신청해서 연락 달라고, 그렇게 사촌형과 식사 후 10흘만에 중국 공장에 도착했다. 영화과 포함 10년 넘게 영화만 한 내가 한순간 중국 공장에 떨어지다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중국에 도착해서는 개념도 없이 그냥 시키는 일만 열심히 했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치열하게 중국에서 3개월 후 한국 회사에 일 년 그리고 다시 중국회사에서 3년 가까이 일하고 한국에 다시 돌아오니 그동안 한국생활을 모두 단절된 후였다. 내가 중국에 있는 동안 한국에서 가장 소중한 내 물건들이 모두 사라 졌는데 그중 내가 가장 아끼던 영화 시나리와 콘티북이 없어진 건 아직도 가장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이 좋은 게 한국에서 다시 전화를 계통하니 그동안 중국에서 차단한 카톡이 활성화되면서 내가 알던 스텝들 연락처가 상당 부분 복구된 것이다. 지금은 영화를 다시 하라고 떠밀어도 물리적으로 힘들 것 같다. 그동안 책임져야 할 식구도 생기고 중국에 있는동안  단절된 영화 쪽에서 나를 받아들여줄지 가장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도 자신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가끔 연락하는 제작 스텝은 이제 어엿한 PD 타이틀을 달고 활동하고 있지만 영화 환경이 그렇게 녹녹지만은 않다는 소식을 전하곤 한다.

영화 쪽 일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아직 치열한 현장에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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