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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안 Aug 10. 2021

홍차는 무슨 맛

과거의 맛


비 오는 날, 막걸리에 파전은 이제 내게 옛 말이나 다름없다. 뉴질랜드에서 비싼 한식은 백수 한정 사치라서 양식을 주식으로 삼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변덕스럽게 구는 뉴질랜드 날씨에 일기예보를 자주 들여다보는데 오늘은 변함없이 비 소식이 있었다. 막걸리는 고사하고 뉴질랜드에서 즐겨 마시던 홍차가 문득 마시고 싶어 졌다. 우리 집 근처에도 체인점 카페가 있는데 너무 컴컴한 조명 탓에 딱 한 번 간 뒤로 더 이상 가지 않게 되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고속도로를 이십 분간 달려 시티에 금방 도착했다. 아침 일곱 시부터 문을 여는 곳은 카페가 전부라서 안개가 자욱한 거리를 둘러보다 그에 걸맞은 재즈가 울려 퍼지는 카페에 들어갔다. 하얗게 칠해진 벽을 힐끗 보고서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음습한 날씨를 짓누르는 포근한 음악소리는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뉴질랜드의 이른 아침 풍경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생각보다 느린 발걸음으로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출근 전에 커피 한 잔씩은 필수인 이 나라에서 대부분의 카페가 여덟 시 전에 문을 열고 직장인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 같은 백수가 그 사이에 외롭게 낀 상태로 눈치 보지 않고 오래 앉아있기 위해 마실 것과 함께 간단한 아침까지 주문을 완료했다. 한국이었다면 고민 없이 아이스 라떼를 주문했을 테지만, 한국과는 반대로 더워 죽어도 따뜻한 커피인 뉴질랜드에서는 라떼보다 조금 진한 플랫화이트나 겨울에는 거품이 풍성한 카푸치노를 선호한다. 안타깝게도 요즘에는 커피를 자주 마시지 않았더니 한 잔만 마셔도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 가급적 멀리하고 있다. 커피 대신 홍차를 주문했다. 홍차에 넣어 마실 우유도 빼놓지 않았다. 다행히 차 한 잔으로 밤에 불편할 만큼 카페인에 쥐약은 아니다.


홍차를 처음 마셔본 건 삼 년 전의 일이다. 내게 새로웠던 커피 종류인 플랫화이트에 익숙해질 무렵 차 문화 역시 조예가 깊은 뉴질랜드에서 홍차를 단골 메뉴로 만들었다. 향긋하고 단 맛이 훨씬 강한 한국의 밀크티가 입맛에 더 맞는 건 사실이었지만 익숙한 맛보다 새로운 맛에 친숙해지는 과정이 좋았다. 작은 주전자에 담겨 나오는 뜨거운 차와 그 보다 훨씬 작은 주전자 모양의 잔에 담긴 우유를 취향에 따라 마시는 재미도 있다. 플랫화이트 한 잔을 손잡이로 들고 금방 마실 때 보다 카푸치노의 두툼한 거품을 숟가락으로 저어 마실 때와 같은 재미다. 차 하나를 따라 마실 때 보다 우유를 섞어 마시는 한 모금은 향이 금방 날아가지 않고 입 안에 부드럽게 머금어진다. 우유로 코팅이라도 된 듯 매끄러운 맛에 설탕 없이도 미묘하게 단 맛이 흐르는 홍차는 아침, 점심, 저녁 상관없이 원할 때마다 마셔도 어디에나 어울린다. 한 번은 집에서 다른 종류의 차에 우유를 넣어 홍차의 맛을 내보려다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맛을 보기도 했다. 겉보기엔 그럴싸한 모습에 우유와 차가 전혀 섞이지 않아 입 안에서 제각각 놀아날 줄도 모르고 잔에 담긴 나머지를 버려야만 했다.


English breakfast tea with milk


홍차 사랑까진 아니어도 유일하게 즐겨 마시던 차를 몇 년 만에 제대로 마시려니 약간의 설렘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주문을 하고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홍차가 먼저 테이블에 올라와있었다. 찻잔에 차를 절 반 정도 따르고 모자란 듯 보여 더 따르려다 뚜껑이 뜨거운지 모르고 손을 데었다가 놀랐다. 카페에 와서 홍차를 마지막으로 마신 게 얼마나 오래된 지 가늠할 수 있는 작은 실수였다. 우유를 얼마나 넣어 마셨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 했지만 뚜껑에 살짝 덴 손의 감을 믿고 조심스레 따라 드디어 한 모금을 마셨다. ‘어? 이게 아닌데? 우유를 더 넣어볼까?’ 그래도 이 맛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던 홍차의 맛은 뭐였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고개가 한쪽으로 갸웃거려졌다. 미각이 아닌 머리로 기억하던 홍차 맛이 사라질까 ‘카페가 다르고 사용하는 티가 달라서 그런가 보다’며 애써 수습했다.


Spinach and feta cheese tart


다행히 아까 같이 주문한 시금치 페타 치즈 타르트는 굉장히 맛이 좋았다. 바라던 홍차 맛은 느낄 수 없었지만 안락한 분위기와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은 음식으로나마 만족을 하고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많은 손님들로 바쁜 분위기 속에서 대비되는 느린 템포의 음악과 얼마 없는 밝기에 취해 생각 없이 든 홍차에서 간직하던 맛이 나는 바람에 정신이 차려졌다. 달라진 거라곤 처음 와본 카페에 차츰 스며들었을 뿐인데 갑자기 누군가 와서 내 홍차에 설탕이라도 탄 건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찰나였다. 차분한 홍차에 몽글몽글 카페의 분위기가 담긴 듯 맛과 분위기의 전체가 어우러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찾던 맛은 과거 즐겨 마시던 홍차가 아니라 부드럽지만 텁텁한 홍차 한 모금마저 달게 느껴지던 그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는 차 마시는 법도 모르면서 홍차 마시기를 즐겼다. 정확하게는 홍차의 맛이 아니라 홍차를 들고 즐거웠던 그날의 분위기 덕에 맛있음이 더해진 것이다. 그렇게 삼 년 동안이나 홍차 본연의 맛은 잊은 채 왜곡된 기억만을 간직하며 그리워했다. 낮 선 순간들이 익숙함으로 변하는 동안의 시간만큼 기억은 점차 흐려져 순수했던 즐거움만이 남아있다. 고단한 혹은 지루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기억하지 못하는 힘에서 온다. 오늘의 설탕 없이 밋밋한 홍차도 달짝지근한 맛이었다고 잘못된 기억을 가지고 또 다른 하루를 즐겁게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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