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이 만든 창조 이야기
파리를 방문할 때 개선문을 찾는다면 꼭 꼭대기까지 올라가 봐야 한다. 개선문을 축으로 12개의 대로가 뻗어 나간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에투알’은 불어로 별이란 뜻인데 왜 여기를 '에투알 개선문'이라 부르는지 꼭대기에선 금방 이해된다. 콩코드 광장에서 샹젤리제 거리 그리고, 다시 반대쪽으로 라데팡스 개선문까지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직선이 눈길을 끈다.
파리를 여타 유럽의 도시들과 구별 짓고 있는 이 모습을 만든 인물은 바로 오스만 남작이다.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 때 이야기다. 나폴레옹 3세는 집권 후에 도시 개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아마도 1666년 대화재 이후의 런던에 주목했던 듯하다. 세인트폴 대성당부터 교회와 집 등 도시 전체가 파괴됐지만 도시 재건을 이뤄낸 사례다. 이걸 모델로 나폴레옹 3세는 1853년에 도시 개조의 책임자로 오스만 남작을 지목한다. 이게 지금의 파리를 만든 재정비의 시작이었다.
물론 이 프로젝트엔 혁명과 시위를 차단하려는 숨은 의도도 있었다. 관련해 홍세화 씨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당시 몇 개의 간선도로의 폭을 대폭 확장한 숨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게 실은 바리케이드를 치기 어렵게 하기 위한 것이었대요. 길 양쪽의 건물이 높고 또 돌로 되어 있으니까 폭이 좁은 길에는 아주 쉽게 바리케이드를 칠 수 있었고 또 몇 군데만 막으면 전 구역이 이른바 해방구가 될 수 있었거든요. 당신이 '레미제라블'을 읽었거나 영화를 보셨으면 알 수 있듯이 바리케이드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회 투쟁의 거점 확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었어요"라고 소개했다.
사실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기까지 파리는 지속적으로 혁명과 폭동의 중심지였다. 좁은 골목길은 정부 입장에선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시민들의 게릴라전을 통제하고 바리케이드를 무력화시키려면 직선의 폭넓은 길이 필요했다. 그리고 도로포장 이슈도 정부 입장에선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정부 측 사망자 중엔 총탄보다 다른 무기로 숨진 경우가 많다고 나온다. 혁명군들이 화강암을 건물 맨 위층으로 끌고 올라가서 병사들의 머리를 향해 던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포장된 도로를 만드는 개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또 하나, 위생 문제도 있었다. 당시 파리 인구는 60만 명이었다. 100만 인구의 런던 바로 다음이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과밀한 인구는 여러 문제를 낳는다. 예를 들어 1832년에 파리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온 사회가 홍역을 치렀다.
오스만 남작은 질병의 원인이 불결한 빈민이라고 봤다. 그래서 빈민들의 주거 지역을 관통하는 대로를 만들면서 빈민들을 도시 외곽으로 내몰았다. 1852년 스트라스부르 대로를 뚫으면서 서민들의 시장 지역을 일부러 없애버린 게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오스만 식의 도시 개조를 놓고 평가는 엇갈린다. 그래도 상수도와 함께 오스만이 정비한 하수도 600km애 대해선 긍정 평가가 많다. 사실상 근대적 상 · 하수도망을 만든 것이라서다. 그리고 이 모든 사업을 마치면서 상징 건물로 지은 게 오페라 가르니에다. 1875년의 일이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경우는 파리와 또 다른 방식으로 도시 개조가 이뤄진 사례다. 빈은 19세기 중반까지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이었던 곳이었다. 오스만이 점령한 헝가리 국경은 빈에서 15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평지가 계속 이어진 곳이라 접근성도 나쁘지 않았다. 이게 여행지로 부다페스트와 빈을 묶는 이유이기도 하다.
빈에서 이렇게 오스만에 대항해 구도심을 둘러쌓았던 성곽은 지금은 볼 수 없다. 이게 없어진 건 로트링겐 대공이 술탄 메흐메트 4세와 전쟁을 하던 때였다. 엄폐물로 쓸 수 없게 하려는 목적에서 불태워버린 것이다. 그 결과 450m의 폭에 총연장 5.2km의 공터가 남게 됐다. 이곳이 바로 거리 링 스트라세 Ringstrasse의 출발이고 도시 빈의 개조가 이뤄지는 출발이 되게 된다. 링 스트라세는 우리말로 하면 원형 도로 정도라고 해야겠다. 이곳에다 새로운 건물과 공원이 들어서는 방식으로 도시가 정비된다.
1857년 12월 20일 자 요제프 황제가 교서에 통해 이른바 ‘링 스트라세 프로젝트’라 불리는 비엔나 도심지 개발 사업을 공식 발의한다. 확장 중인 도시 발전에 사실 성벽의 잔해들은 장애물이기도 했다. 교외 지역을 도시로 편입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빈이 파리와 달랐던 점은 빈은 구도심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재개발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제약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제약은 창조의 원천이다.
덕분에 빈은 흥미로운 도시 구조를 갖게 됐다. 슈테판 성당을 중심으로 한 구도심은 과거 중세의 유물을 간직하고 있고, 그 주위를 원형으로 감싼 링 스트라세라 불리는 링 모양의 도로에 공공시설들이 들어섰다. 국립오페라극장, 오스트리아 의회 의사당, 빈대학교, 부르크 극장, 빈 시청 등이다. 의사당 건물은 의회 정부를, 시청사는 자치시를, 대학교는 시민의 고등교육을, 부르크 극장은 문화예술을 각각 대표하는 시설물들이란 점에서 상당히 계획적으로 만든 시설물들이란 점이 특징이다. 대로는 1865년에 완성됐고 2001년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바로크식 오페라하우스, 르네상스 양식의 미술사 자연사 박물관, 고딕식 교회 등 건설 시기가 엇비슷함에도 불구하고 건축양식은 다채롭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트램을 타고 이동해도 좋고 한 바퀴 걸어도 좋은 지역이 이곳 링 스트라세다. 이 원형 도로에서 다시 구도심 외곽지역으로 뻗어가 보면 거기엔 신흥 부르주아나 노동자들이 거주하면서 이후 현대식 건물이 만들어졌다.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두 도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