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다시 억울하지 않도록
아이는 잠이 오지 않으면 칭얼거린다. 그것이 밤 10시든 11시든. 잠이 오지 않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직 만 3세. 4살에서 한살이 깎인 만 3살짜리 둘째 딸의 이야기다.
세상의 아빠들이 대부분 '딸바보'라고 불리듯, 나 역시 딸을 매우 아끼고 사랑한다. 그렇다고 해서 첫째인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딸을 더 이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가 첫째에게 조금이라도 더 엄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내가 딸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나름대로 교육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확고한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막내들이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다고 이야기한다.
글쎄. 그런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마 부모들 입장에서도 가장 어린 모습을 마지막으로 봤고, 그때 귀여워했던 기억 때문에 마지막에 사랑을 주었던 기분으로 그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노파심에서 미리 말하자면 우리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나름의 방식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셨고, 어릴 때부터 크게 아팠던 내가 살아남을 수 있게 보살펴 주셨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막내들은 '기회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내 오랜 경험에서 온 지론이었다.
나도 첫째를 키워본 입장에서 첫째에게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발생한다.
말 그대로 초보 엄마, 초보 아빠인 관계로 육아라는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접촉사고부터 주차사고까지 별별 사고가 일어난다.
처음 새로 산 내 자동차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경우도 많다. 액세서리를 좀 더 달아본다거나 꾸미기 위해서 돈을 쓰는 경우도 많다.
비슷하게 첫째에게는 시행착오와 운전미숙도 있지만 많은 시도를 해본다. 모빌을 달아줘보기도 하고 육아용 템을 뭔가 써보기도 한다. 그리고 몇 가지 대 실패를 겪고 나면 둘째 때는 그걸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각기 다르다. 첫째에게 무소용이었다 하더라도 둘째에게는 꿀템일 수 있건만 나름 운전에 자신이 붙은 갓 초보 딱지를 뗀 부모들은 익숙하게 첫째에게 쓰던 방법을 사용한다.
어린 시절, 우리 형에게 학습지 교육을 시켜봤던 부모님은 형이 학습지를 밀리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는 학습지를 시켜주지 않았다.
형이 중학교에 갈 무렵, 형이 성적이 떨어지자 그게 형이 소설책을 읽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부모님은 우리 집 전체에 '교과서를 제외한 책 금지령'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학교나 도서관에 가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었다.
형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주산학원을 다녔지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에 그만둬야 했다. 형이 주산을 그만둘 때쯤이었다.
형은 졸업식 때마다 부모님이 찾아가셨다. 그리고 군대 면회조차도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가셨다. 나에게는 한 번도 면회를 오신 적이 없었다. 물론, 대학교 졸업식에 부모님이 오셨지만... 사실 대학교 졸업식 같은 건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오신 거라서 나는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위의 몇 가지 중 경제적 이유가 작용한 것도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야기해 보면 부모님은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었다고 하신다. 그럼 오히려 내가 더 억울할 뿐이지.
심지어 그것 조차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서 약간 벗어난 이야기다.
나는 4-5살 정도에 우리 집이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무언가를 조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부모님을 조르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 갖고 싶지 않았다거나 그런 욕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상황을 인지하고 그에 맞게 살았을 뿐이다.
내가 잘 참는 편이라서 부모님은 내가 6살 때 이미 하루종일 집에 나를 혼자 두고 일하러 다니셨다. 지금 내 아이들을 생각해 보면 6살짜리를 하루 종일 집에 혼자 놔둔다고? 정신이 어질어질할 일이다.
하지만 그 시절은 그랬다.
잘 떠올려 보면 누나가 6살이던 시절에도 누나와 4살짜리 나를 둘만 집에 놔두고 일을 하러 가셨다.
4살짜리에게는 4살 정도에 생기는 욕구들이 있다. 발달단계나 이론이 꼭 맞는 것은 아니다 하더라도 충분히 그런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어렴풋이 들여다 보아도 알 수 있다.
내가 조금 더 어른스럽게 대처한다고 욕구나 욕망을 참을 때, 옆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아는 것은 나뿐이었다. 그깟 칭찬이 얼마나 위안이 될까. 생각보다 칭찬 따위는 고래는커녕 벼룩도 춤추게 하기 어렵다.
성격적으로 조용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원래 관종의 피를 가지고 있었다. 그저 상황에 따라서 참고 인내할 뿐이었다.
그건 전부 스트레스다. 나이에 맞게 까불고 놀고 장난치고 말을 듣지 않고 싶은 마음이 나라고 없었겠는가? 그런데 오히려 평소에 말을 잘 듣고 모범적이던 나에게 더 어릴 때 더 엄격한 잣대가 디밀어졌던 기억이 아직도 나를 아프게 찌른다.
나의 육아 방법에 대해서 어머니와 의견충돌이 있었다. 첫째를 낳을 때부터 오래 같이 계셨던 어머니는 첫째에게 조금 더 정이 있다. 그래서 내가 첫째에게 엄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둘째를 '편애'한다고 생각하신다. 둘째가 딸이라서 내가 너무 감싸고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말하기도 지친다. 하지만 또다시 말씀을 드린다.
둘째는 아직 4살... 지금은 만 3살로 불리는 나이다. 그 나이 때는 저 정도의 짜증과 불만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건 둘째가 딸이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 비교해 보면 첫째에 비해서 오히려 덜 짜증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 8살... 아니 만 6살로 불리게 된 첫째와 계속 비교를 한다. '오빠는 얌전히 자는데 왜 너는 자꾸 그러니!'라면서.
첫째가 4살 일 때, 꽤나 자주 전쟁이었다. 나는 1시간씩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고 잘 때까지 책을 1시간씩 암송해 준 적도 있었다. 심지어 자는 시간도 지금보다 1시간 늦은 10시가 기준이었다. 그럼에도 툭하면 11시 12시에 자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4살이라서 그랬다고 생각하고 꾹 참고 노래도 불러주고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얼르고 달래서 재웠다. 그런데 왜 둘째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8살인, 아니 이제는 만 6살이 되어버린 지금의 큰애와 비교하면서 얌전하게 자기를 바라는 걸까?
나는 늘 억울했다. 더 어른스러운 건 항상 손해 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나이에 비해서 어른스러운 행동을 했을 때 무작정 칭찬하는 게 아니라 그에 눌렸던 욕구를 보살펴주는 것을 함께 해주고 싶었다.
둘째는 요새 가끔 말을 안 하고 그냥 짜증을 부리거나 우는 소리만 낸다. 나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다.
둘째와 같은 반에는 말을 아직 못 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아무래도 의사소통이 힘들다 보니 말도 안 하고 친구들의 물건을 뺏거나 마음대로 짜증을 부리는 일이 많다. 둘째는 자기는 말하는데 친구들이 말도 안 하고 그런 행동을 해서 답답하다고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도 안 하면서 짜증을 부리는 애들을 조금 더 신경 써줄 수밖에 없다.
그게 답답했는지 아니면 부러웠는지 점점 그런 행동들을 역으로 배워서 따라 하고 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아이가 말로 안 하고 칭얼거리는 게 답답하다. 괜히 어리광 부리고 떼쓴다고 야단치게 된다. 하지만 같은 나이대의 발달과정으로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행동이다.
거기다 위에 쓴 대로 자신의 또래집단이 대부분 그런 방법으로 이득을 얻어내거나 관철시키는 것을 봤다면 더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결국 어린 시절의 자신을 육아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동으로 친자확인이 된다는 것은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둘째가 내가 느꼈던 억울함을 느끼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래서 첫째와 현재의 시간에서 평행비교 하는 게 아니라 그 나이에 맞게 비교를 해주고, 4살이 4살 대접받는 것을 8살이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첫째에게 주의를 줬다. 첫째는 자신이 동생을 돌봐야 하는 게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동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오빠와 공유해야 한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4년간 풀타임으로 부모를 독점했던 첫째가 둘째에게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이해는 해줄 수 있지만 옳은 일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그리고 8살이라면 그걸 이제 조금씩 이해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런 내 방침은 주변 사람들, 심지어 내 가족들이 보기에도 그저 내가 딸바보라서 딸을 편애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속으로 분노가 차올랐다. 나 스스로 나를 구제하는 기분으로 둘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있는데 그 따위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육아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육아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고 봤을 때, 그리고 지금 사회가 개념 없는 학부모들과 아이들로 떠들썩한 것을 두고 봤을 때, 전체적으로 대다수의 육아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길거리에서, 식당에서, 카페에서, 부모가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느라 통제되지 않는 아이들을 보는 횟수는 점점 늘어난다.
내가 엄하다고? 당신들이 놓치고 있는 거다. 육아의 개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