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도
귀를 쫑긋거려봐도
여러분은 혹시 남이 보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도 꾸준히 연습하는 일이 하나쯤 있으신지. 나는 있다. 바로 귀 움직이기인데, 연습한지도 어연 10년이 넘었으니 그 역사가 꽤나 깊은 셈이다. 고등학생 시절 침대에 누워서 신체 여기저기에 힘을 줘보고 있는데 별안간, 오른쪽 귀가 쫑긋하고 움직였다. 그 뒤로 신기해서 자재로 움직이는 방법을 연습하기 시작한 것이 제법 진지해져서 지금에 이르게 됐다. 처음에는 눈썹 움직임에 따라 꿈틀꿈틀 애벌레처럼 미세하던 움직임이 나중에는 점점 새로운 신경 통로가 연결된 것처럼 귀만 자율적으로 팔랑팔랑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불수의근인 귀의 근육을 단련하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니 무척 근사하지 않나요. 몇 번 주변에 보여줬던 적도 있는데 다들 무척 감탄하곤 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어쩐지 늘 오른쪽 귀만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아무리 시간을 들여 공들여 연습해도 좌측 귀는 언제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예전에는 양쪽을 모두를 움직일 수 있다면 ‘스타킹’에도 출연하겠는걸. 기대도 했었지만 그사이 폐지가 되어버려서 이제는 혼자만의 소소한 장기로 열심히 연습 중에 있다.
물론 귀를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어떤 이점이 있는가 하고 정색하고 물어봐도 콕 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평균보다 청력이 월등하다든가, 귀를 움직여 모자를 벗는다든가 하는 편리한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오른쪽 귀를 움직일 수 있는 대신(이랄지), 오른쪽 눈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윙크를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귀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다른 사람이 쉽게 가질 수 없는 명확한 장기로서 무척 뿌듯하게 생각하고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기분 나쁜 말을 하면 속으로 ‘귀도 쫑긋거릴줄 모르는 무능한 자식이’ 하고 무시해버린다. 누가 뭐라건 나에게는 남들이 할 수 없는 명확한 재주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실제로도 묘하게 기분이 나아진다. 그렇게 나는 아직도 오른쪽 귀를 단련하는 한편으로는 왼쪽 귀도 움직이려는 노력을 하는 중이다. 인류에게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신체 기능이 숨겨져 있을지도.
재수학원 시절에 냉소적이고 신랄한 유머 코드를 지닌 국어 교사가 있었다. 그는 수업 시간에 특유의 냉철하고 염세적인 농담을 자주 했는데, 대체로는 대놓고 깔깔 웃지는 못할 농담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그중에서도 지극히 세세한 것까지 달달 외워서 공부하는 수험생을 보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한 우물만 파서 성공한다는 것은 그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만 성립되는 말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을 통해 한 분야의 장인이 된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효용이 있거나 나름의 내적 가치를 지닌 일을 뜻하는 것이지, 이상한 짓을 1만 시간 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장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똥 퍼먹는 일을 10년 했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똥 퍼먹기‘의 장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흐음, 그때 당시에 나는 그 말을 듣고 격의 없이 그대로 감탄해버렸다. 그렇지. 똥을 효율적으로 퍼먹는다고 해서 우리는 장인이라고 부르지는 않겠구나. 하면서. 그런 사람이 있다면야 물론 엄청난 구경거리가 되기는 하겠지만.
내가 아는 가장 ’똥 퍼먹기‘와 비슷한 작업은 나치의 고위 공무원 아이히만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밤낮을 세워가며 어떻게 가장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단기간에 죽일 수 있는지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수용소로 이동하는 중에 몇 퍼센트가 죽게 되는지, 식량을 얼마나 줄여야 효율적으로 포로의 수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과학적으로 계산한다. 가스실에 얼마큼의 가스를 살포해야 하는지, 시체를 옮기는 역할의 유대인을 시체와 동시에 생매장하면 자원을 얼마나 아낄 수 있는지 따위를 착착착 계획하여 오차 없이 실행에 옮긴다. 그런 끔찍한 기록을 읽고 있을 때면, 똥 퍼먹기가 되려 가치있는 일처럼 느껴진다. 흐음, 그렇다. 아무래도 이런 일들은 아무리 잘해봤자 장인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소설로 쓰여져 영화로도 나와 있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 파이는 어릴 적 이름으로 많은 놀림을 받곤 했다. 그의 본명인 ‘피씬’의 발음이 ‘오줌 지리다’의 'Pissin'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묘수를 하나 생각해 내는데, 자신의 이름 앞 두글자인 'Pi'로 자신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내처 나가서 그는 원주율(파이)의 소수점을 외우기 시작한다. 놀림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에 결국 그는 교실의 블랙 보드를 꽉 채울 만큼 원주율의 값을 외우는 데 성공했고, 이름하여 전설의 파이로 불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나는 언젠가 실제로도 원주율의 소수점을 끝없이 적어 내려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수학자는 ‘원주율 박사’로 몇 년에 걸쳐 그 작업을 하고 있다. 그 목적은 원주율의 무한함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 그런데 무한하다는 것은 과연 영원히 증명될 수 있는 것일까. 정사각형의 좁은 회벽방에, 뭉뭉한 조명이 비추는 책상에 종이를 펼쳐 놓고, 사각사각 원주율의 소수점을 한없이 적어 내려가는 쓸쓸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제는 그 역할을 이어 받아서 양자 슈퍼 컴퓨터가 원주율을 끝없이 써내려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제 평생에 걸친 그 과업을 멈추게 됐을까. 몇 년에 걸친 인고의 노력이 단 몇 초만에 추월당하게 된다면, 거기에는 어떤 가치가 있던 것일까. 체스 플레이어와 바둑 기사들은 어떻게 그것이 괜찮을 수 있는 걸까. 아무리 귀를 쫑긋거려봐도 나는 그 기분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