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말 Aug 31. 2023

세상에 나쁜 짐은 없다

세상에 나쁜 짐은 없다          


  또다시 짐 이야기. 사람이 한곳에 오래 머물면 짐이 늘어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행을 오래 하다보면 이상하게 짐이 조금씩 늘어난다. 머무는 장소에 짐이 쌓이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거처를 이동하는 것이 본질인 여행은 왜 자꾸 짐이 쌓이는 것인가. 여행도 이제 중반에 들어선 지금. 캐리어에 채 들어가지도 못할 짐을 꾸역꾸역 욱여넣고 있을 때면, 물건만 늘어나고 판매 실적은 영 형편없는 세일즈맨이 된 기분이다.      

  내가 들었던 가장 완벽한 여행은 점차 짐이 줄어가는 여행이다. 말만 들어도, 생각만 해봐도 속이 후련하다. 그런 여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오래입은 티셔츠, 다 뜯어진 팬티, 구멍 난 양말의 세 조합이 필요하다. 마치 커플의 마지막 이별 여행처럼 여행지에서 하루를 보내며 석별의 아쉬움을 나눈다. 그리곤 호텔로 돌아와서, 깨끗하게 목욕재계를 한 뒤, 둘둘 말아서 쓰레기통에 버린다. 일별의 시간동안 그 옷들과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이 스쳐 지나간다. 눈물 또르륵. 세상에서 가장 쿨하고 터프한 이별이 있다면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닐까.      


  실례로 지금 나와 같이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은 모든 호텔에 자신의 팬티를 하나씩 버리고 간다. 팬티로 영역을 표시하는 변태 성욕자 같은 것은 아니고, 오래된 속옷을 마지막으로 입고 버린다는 것이다. 군대에서부터 동고동락했던 속옷이라고 하니, 전우를 두고 전장을 떠나는 분대장의 심정이다. 그 전우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신체를 오랫동안 지켜주었던 것이다. 나도 따라서 양말과 속옷을 둘둘 말아서 몇개쯤 버렸다. 실제로 별 차이는 없겠지만 짐은 굉장히 가볍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것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기 때문일까. 이별 후에 추억의 물건을 내다 버리는 사람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물질적인 행위는 언제나 비물질적인 상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곤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짐을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와중에도 어쩐지 여행짐은 점점 늘어만 간다. 그것은 여행자에게 업보와도 같은 숙명이다. 전세계에는 언제나 ‘전세계 오직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다는 품목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후지산 전망대에서는 그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열쇠고리를 팔고, 디즈니 랜드에서는 정식 인증 마크가 붙어있는 귀여운 푸우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기다리고 있다.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것은 언제나 당시 우리의 주머니 사정과 직결되는 시가적인 요소다. 

  따끈따끈한 어제 이야기. 규슈 니넨자카 골목에서 우연히 골동품 수베니어 샵에 들어 갔다가 호쿠사이의 예의 그 유명한 파도 그림을 하나 건졌다. 족자처럼 벽에 걸어 둘 수 있는 멋드러진 하이 퀄리티 작품이 단돈 1600엔. 계산 오네가이시마스. 숙소에 돌아와 캐리어에 쑤셔 넣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것은 마치 배터지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위장에 디저트 들어갈 자리는 있다고 말하는 여자애들과 같은 이치는 아닐까. 귀여운 토끼가 그려진 새해 달력, 여자친구 선물인 토토로 동전 지갑, 유후인노모리 특급 열차 기념 타월. 그 옆에 잘 찾아보면 어딘가 족자 자리는 하나쯤 남아 있을거다.     


  최근에 본가에 가서 묵은 짐을 정리하는데, 과거의 내가 여행에서 대책 없이 챙겨온 자잘한 물건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그것은 과거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 각질 만큼이나 무의미한 것들이다. 2012년 1월 피렌체 박물관 입장권, 파리의 지하철 노선도, 각종 식당과 카페의 영수증, 비행기 수하물 보증서, 바티칸 해설사 투어 아저씨 명함 같은 것들. 정말 쓸모가 하나도 없죠. 아휴. 20대 초반의 나는 아마 지금보다도 더 대책 없는 놈이었나보다. 나는 대체 왜 그런 것들을 구겨지지 않도록 소중하게 접어서 집으로 챙겨와선 보물처럼 보관하고, 10년 넘게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걸까. 당시의 나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지금와서 생각해봐도 이제는 조그만 이유의 조각조차 찾아낼 수 없게 됐다. 과거의 나는 언제나 쉽게 화해하기 어려운 존재다.     


  여행 중인 나의 짐 목록 속에 추가된 물품들은 모두 나름대로 합리성을 지닌 것들이다. 그들 모두가 하나하나 까다로운 나의 테스트를 통과한 정예 요원들이다. 그렇지만 어쩐지 10년 뒤 어느 날 ‘미래의 나’는 케케묵은 물건을 정리하면서, 10년 전의 나, 그러니까 지금의 나를 무척이나 한심한 녀석이라고 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각질만도 못한 것들을 대체 왜 샀던거야. 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쓸데없는 물건을 샀다가 혼쭐났던 기억이 알알이 떠오른다. 모두 중요한 것들인데. 정말로.


작가의 이전글 심야 버스 통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