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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Sep 15. 2023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바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장면들이 있다. 예컨대, 휴가나온 군인이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장면. 빡빡 머리 장병이 깨끗한 A급 군복을 입고 여자와 발을 맞춰 걷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흐뭇한 웃음이 지어진다. 잔뜩 상기된 표정의 앳된 청년과 포르르 바람에 날릴 것만 같은 원피스를 보고 있으면 마치 꽃가루가 날리는 것처럼 간질간질하고 느긋한 감정이 퐁퐁 샘솟는다. 나도 괜히 물렁해져서 얼굴이 붉어진다. 참 좋을 때군. 훗훗. 저 군인 친구는 귀중한 휴가를 맞아서, 제대로 옷도 갈아 입지 않고 여자애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들뜬 마음으로 달려 나온 것이다. 머릿속에서 이미 친구들과 부모님 친지들은 겨울철 제설 작업처럼 말끔히 밀려나 버렸다. 여자 쪽에서도 한껏 차려 입은 채로 데이트 상대가 자신만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는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짧디 짧은 휴가 시간을 무척 충만하게 보내기 위해 고심하는 중이다. 휴가를 나온 군인들은 어쩐지 여자들 앞에서 한결 수줍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안 그런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그런 착각 속에서 나는 왠지 안락하고 조금 낙관적인 마음이 된다.     


  애인을 군대로 보내는 일이란 여자 입장에서 한편으로 무척 슬프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안에 갇혀서 허튼 짓을 하거나 바람을 피울 일도 없고, 밤마다 한심하게 술에 취해서 헤롱헤롱 대지도 않을 테니까. 게다가 공들여 쓴 손편지도 받고, 소소하게 모은 봉급으로 아기자기한 선물도 보내온다. 둘 만의 휴가를 열성적으로 계획하고, 보초를 서는 깊은 밤 중에 별을 세며 굉장한 밀도로 나를 소중히 떠올려준다. 군대라는 폐쇄되고 제한된 생활은 남자들을 가일층 단순하고 투명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 여자 관계에서도 즉물적이며 쉽사리 헷갈리게 굴지 않는다. 데이트를 하러 나온 군인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보이듯 상대방에게 알알이 전해진다. 아마도 그런 순수함과 솔직한 면은 그 자체로서 여자들에게 귀여운 ‘세일즈 포인트’가 되는 것은 아닐까. 여자들은 언제나 귀여운 것이라면 홀라당 넘어가고 맥을 못추는 법이니까. 그러다 남자가 나이가 들어가고 어느덧 경험치가 쌓여서 그런 단순함이 일종의 ’귀중한 세일즈 포인트'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남자들은 어딘가 시큼해지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아저씨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저런저런. 그러고 보면 군복무 기간이란 끝없이 불행하면서도 끝없이 충실한 시간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여성분들은, 군인들과 부디 데이트 많이 해주시기를. 투정 부린다고 막내 아들처럼 한심하게 여기지만 마시고. 다들 열심히 고생하는 멋지고 가여운 청년들입니다. 어쩐지 ‘우리 강아지는 착해서 안 물어요’라고 말하는 견주가 된 것 같지만.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커플이 다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은근히 내가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다. 물론 실례가 되니까 대놓고 지켜지는 못하지만 슬쩍슬쩍 상황을 확인하거나 귀로 열심히 훔쳐 듣는다. 충분히 운이 좋다면 다른 스포츠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고 숨막히는 공방전을 볼 수 있다. 마치 축구 중계를 보면서 훈수를 두는 것처럼 ‘나라면 이렇게 반박했을 텐데’ 라거나 ‘와우, 방금 공격은 엄청났는걸’ 하면서 속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운이 좋다면’ 그렇다는 이야기지 대부분의 경우 한 쪽의 원색적인 비난인 경우가 많아서 금세 흥미를 잃게 된다. 역시 어떤 스포츠건 너무 일방적이면 보는 쪽에서도 재미가 떨어진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째서 대부분의 커플들은 남자 쪽에서 ‘혼나며 쩔쩔 매는 역할’을 하고 여자 쪽에서 ‘성질을 내거나 몰아 붙이며 혼내는 역할’을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흐으음. 그렇다면 사랑 싸움이란 이런 두가지 경우가 대부분인 걸까. 1. 커플 사이의 잘못은 대체로 남자가 저지른다. 2. 여자들이 보통 발끈을 잘하고 화를 쉽게 낸다. 나는 잘못은 자주 하지만 발끈 하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상대 쪽에서는 발끈을 했지만 내가 못 알아 챈 것일지도 모른다. 혹시 정확한 이유를 아시는 분이 있다면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좋겠다.      


  전에 다른 글에서 썼던 이야기인데, 일본의 홋카이도에서 투어 버스를 타고 비에이 지역을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한 커플이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말다툼을 했다. 정확히 말해서 그건 다툼이라기 보다 일방적인 구타에 가까웠다. 자리가 좁다느니, 남자가 돼서 사진도 못 찍는다느니, 대화가 재미도 없고, 걷기가 힘들다느니 하면서 이건 투정도 아니라 면박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다툼 구경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이렇게 모자를 씌워주면 쓰라는거야 말라는거야’ 라는 말까지 듣고는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때마다 남자가 하는 반응이란 고작 헤헤 거리며 넘어가거나 ‘나름 열심히 했는데..’ 라면서 머쓱한 표정을 짓고 시무룩하기만 했다는 거다. 점심 식사 때도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남자 쪽에서 ‘맥주 더 마실래?’ 라고 했더니 ‘내가 안 마신다고 말했잖아!’ 라고 엄청난 짜증 수치로 으르렁 거렸다. ‘그럼 혹시 제가 마셔도 될까요?’ 라고 장난을 쳐보려다가 아무래도 괜한 참견 같아서 그만 뒀다. 흐음, 언제나 싸움 구경이 재밌는 것만은 아니구나.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다.     


  최근에 산책을 하다가 ‘아쿠아리움 카페’라는 것을 발견했다. ’도대체 아쿠아리움 카페란 뭘까?'하고 호기심이 생겨서 가까이 가보니 마침 문이 닫혀 있었다. 얼굴을 바짝 붙이고 유리문을 통해 내부를 살펴보니 커다란 수조에 다종의 어류가 빠끔빠끔 여유롭게 헤엄을 치고 있다. 멍청해보이는 점박이 가오리도 몇 마리나 있고, 머리에 거대한 혹이 나있는 공룡 같은 신비로운 물고기도 있다. 어딘가 우럭의 진화 형태처럼 검은 롱드레스를 입은 물고기도 우아하게 돌아다닌다. 나는 평소 수족관에 가서 물고기 구경을 좋아하는지라 그 자리에서 얼굴을 붙이고 한참을 구경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밖에 나와있는 유아용 풀장 같은 커다란 대야에 소형 거북이들이 한가득 있는 것이다. 거북이들은 저마다 아둥바둥 바닥에서 헤엄을 치거나, 돌 위로 올라와 머리를 길게 빼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그 모습에 매혹되어서 그들이 몸을 말리고 코를 벌름 거리는 장면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그늘을 만들어서 일광욕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살짝 비켜선 채로, 거북이 등껍질의 갈라짐이나 그들이 올라오기 위해 협심하여 버둥거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그것이 어딘가 비현실적인 꿈의 귀퉁이처럼 느껴졌다. 복잡한 도심에서 뜬금 없이 고요한 장소를 발견하고, 문 닫은 아쿠아리움 앞에서 일광욕하는 거북이를 공들여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 알고 있는 가상의 장소에 온 듯, 기분 좋은 폐색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면 아무도 없는 수족관 앞으로 유유자적 노니는 거북이들을 보러 간다. 내 쪽에서 거북이를 빤히 쳐다보면 거북이 쪽에서도 빤히 나를 들여다 본다. 그리고 세상에서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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