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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Sep 16. 2023

잠든 사이

잠든 사이          


  예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처음 해외여행을 떠난 사람이 착륙 전에 이미그레이션 카드를 작성하고 있었다. 영문이 서툰 그는 퍼스트 네임과 라스트 네임이라는 고비를 이럭저럭 넘기고, 생년월일을 기입했다. 그리곤 'SEX'를 적는 칸에서 한참을 곰곰 생각하더니 'NO'라고 적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인 이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지난주다. 외투를 사러 잠시 옷가게에 갔다. 전부터 고대하던 협업 제품이라서 겨를이 생기자마자 매장에 잠시 들렀다. 하나하나 입어보고 마음에 드는 외투를 챙겼다. 인터넷에서만 보고 안 맞으면 어쩌나 했는데, 남녀 공용품이라 다양한 크기가 나와 있어서 다행히 딱 맞는 사이즈를 찾았다. 그리곤 같이 봐주던 여자친구에게 말했다.

'와, 다행이다. 섹스리스라서'     


전에 한 번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급하게 숙박을 하려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호텔 예약이 전부 마감된 상태라서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 심통스러운 마음에 나는 핀잔 투로 말했다. '대체 오늘 몇 명이나 성관계를 하는 거야. 성스러운 날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물론 실제로는 이것보다는 상스럽게 말했다.     


아마도 나와 같은 궁금증(시기심)을 가진 불쌍한 사람이 또 있었나 보다. 한 대학원 연구실에서는 하루 평균 몇 건의 성관계가 이뤄지는지에 대한 표본 연구가 이뤄졌다고 한다. 조사에 따르면 지구에서 매일 대략적으로 1억 건의 인간 성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보통 1회분에 참여하는 인원이 2명이라고 친다면 하루에 2억 명이 관계를 한다는 것이다. 와우. 그 정도면 밤마다 지구촌 사람들이 조용히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참이다. 어쩌면 지금껏 인류의 번영을 책임져 온 것은 다름 아닌 효과적인 방음 설비인지도 모른다.     


'누구랑 누구랑 잤대', '내가 전에 잤던 애가 말이야'

우리는 성관계를 에둘러 말할 때 '잤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화장실에 가면서 '볼 일'을 보러 간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의도일 터인데, 둘이 같이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면 으레 성관계를 했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통은 그 선후가 바뀌는 것이 정석이기는 하지만.


  성관계 이야기는 이만 하고, 같이 잠을 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말할 것도 없이 하루를 마무리하고 같이 새날을 시작하는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서로가 같이 있을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이며, 그 외에도 자신의 가장 부족한 상태를 가감 없이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다. 수면 상태는 가장 유약하고 무방비한 상태다. 게다가 가장 추한 모습이다. 서로의 민낯과 취약을 적나라히 드러내고 나신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 같이 잤다 것은 그렇게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곤 한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다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얼마간은 저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그것은 나 자신이 나의 모든 치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볼일을 보고, 성관계를 하고, 욕을 하고, 불안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먹고, 자주 비겁하고 초라해지는 그 모든 상황에 나는 나를 관찰하고 있다. 예의주시하며 하나하나 손가락질한다. 나의 모든 것에 관여하며, 내가 가는 모든 곳에 같이 간다. 자기 혐오. 그것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의 문제는 살아나가는 지혜를 쌓는 것과 다름 아니다.     


  하지만 하루 중에는 특별하게도 내가 나를 지켜보지 않는 시간도 분명 존재한다. 잠에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잠을 자는 동안만이 유일히 나는 나에게서 나를 차단해 낸다. 두렵도록 지겨운 자신과 잠시 떨어져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잠은 육체와 더불어 정신도 휴식하는 시간이다.


  그런 소중한 시간을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경우가 있다. 마음을 놓고 같이 잘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결국 같이 잔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봐주고, 무방비하고 추레한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상대가 견디어 준다. 혹은 그래주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것은 결국 서글프다. 아무런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대개 이른 새벽 도둑처럼 쫓기든 도망간다. 남겨진 사람이나 떠나간 사람이나 모두 혹시나 하고 자신의 지갑을 열어본다. 사라진 것은 없는지 가방을 뒤진다. 무엇을 훔쳤고 무언가를 도둑맞았단 말인가. 헛헛하고 찜찜한 기분 탓에 잃어버리지도 않은 무언가를 찾는 시늉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나도 잘 모르는 나의 속을 아무에게나 내주었다는 모골의 송연함 때문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성관계는 선택 행위다. 키스가 호감의 확인이라면 성관계는 더 깊은 관계의 선택이다. 그러나 사실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어서 같이 자는 일이 남는다. 하나의 비유나 상징이 아닌 말 그대로 같이 자는 것. 그것은 어떤 하나의 이해다. 스스로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허락이자, 보아 달라는 부탁이다.      

공백으로 남아야 했던 시간의 부분들을 매워 주고, 존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갈라 나누고, 당연한 듯 용감하게 방심하는 사이. 불가침의 영역을 무애하게 드나들고, 비밀을 숨겨둔 캐비닛의 열쇠를 공유하며, 폐쇄된 성역에서의 은밀한 밀회를 즐기는 사이. 그렇게 사람들은 결혼하여 평생 같이 잘 사람을 찾는다. 그렇게 인간은 함께 잠을 잠으로써 제 스스로는 해결치 못할 자기 혐오로부터 결국 구제 될지도 모른다. 바로 타인의 이해를 통하여. 역시 이 세상에서 같이 잔 사이만큼 가까울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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