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첫 번째 도시
로맨틱한 도시로 많이 손꼽히는 피렌체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무섭다’였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도시, 피렌체. 하지만 해가 짧은 겨울이었던 탓일까, 피렌체에 도착하니 어느새 하늘은 짙은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바닥이 울퉁불퉁한 돌로 되어 있어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숙소까지 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버스를 타기에는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걸어가려 했던 것인데, 길이 이렇다면 말은 달라지지..! 지금의 나였다면 바로 택시를 잡아 탔겠지만, 22살의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다리뿐이었다. 체력이 안 좋으면서도 말이다.
사람으로 가득한 광장을 지나쳐 목적지인 호스텔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왔다. 분명 광장에는 식당도 많고 상점도 많아서 온 거리가 휘황찬란했는데,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어두운 거리에 불빛은 간간히 보이는 가로등뿐이었고, 상점으로 보이는 것들은 전부 문을 닫아 한줄기 빛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주위엔 키가 큰 외국인들 뿐이었고 죄다 어두운 옷을 입고 있어서 나의 공포 심리를 더욱 자극했다. 게다가 골목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지도가 내 위치를 제대로 잡지 못했고, 똑같은 곳을 세 바퀴나 빙빙 돈 후에야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캐리어는 무겁고 주위에 빛은 없고, 또 사람들은 죄다 서양인인 데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호스텔은 보이지 않고,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다.
낑낑거리면서 캐리어를 끌고 다시 길을 걷고 있는데 정말 기적처럼 눈앞에 호스텔 간판이 보였다. 여행을 여러 나라 다니면서 알게 된 상식이지만, 외국에서는 호스텔 간판이 우리나라처럼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건물 1층 입구 쪽에 조그마하게 걸려있는 곳이 많다. 첫 외국 여행이었던 나는 당연히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첫 번째 도시에 이어 두 번째 도시에서도 숙소 찾기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금 억울했던 건, 내가 이 건물을 처음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똑같은 장소를 여러 번 돌았지만 호스텔 간판이 이렇게 작게 표시되어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혹 아직 여행 시작의 긴장이 풀어지지 않아서 보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숙소를 찾은 나는 안도의 숨을 뱉으며 긴장을 한껏 풀어낼 수 있었다.
맑은 하늘이 반겨주는 둘째 날이었다.
유난히 제각각으로 생겨 튀어나와있던 돌이 흉물스러워 보였던 지난밤과는 다르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은 왠지 이 돌바닥이 피렌체를 특별히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피렌체는 관광지가 한 데 모여있어 버스를 타지 않고서도 대부분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 도시다. 가장 먼저 조토의 종탑에 올라가서 두오모 성당을 바라봤다. 비좁은 돌계단을 360번쯤은 올랐을까, 붉은 기와로 가득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특히 바로 앞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거대한 붉은 기와돔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과연 르네상스 발상지다운 도시였다. 중세시대 건물과 광장은 조화를 이루어 곳곳에 위치해있었고, 각을 맞춰 일렬로 정렬해 놓은 듯한 건물 배치가 인상적이었다.
빠르게 시내 구경을 마치고 노을을 보러 미켈란젤로언덕으로 향했다.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강에 도착했는데 아니, 이렇게 예쁠 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예쁜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건물들이 빛을 받아 자신만의 쨍한 색감을 잘 드러내고 있었고, 파란 하늘 아래 반짝이는 강물은 실제로 수질이 어떻든 간에 그렇게 맑고 깨끗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내가 지나쳐간 곳이 피렌체 관광지인 베키오 다리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수많은 이름 없는 다리 가운데 한 곳이었다. 이름이 없으면 어떠하리, 누군가에겐 어떤 유명한 것보다 더 신선한 인상을 주었는데.
노을이 지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다시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언덕을 오르고 올라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이미 올라와서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고, 몇몇은 계단에 자리를 잡아 앉은 상태였다. 당장 피렌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로 향했다. 붉은 기와지붕으로 가득한 풍경을 내려보고 있자니, 괜시리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한참을 서서 보는데 어디선가 기타 소리와 함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계단 쪽으로 향하니 그곳에서 누군가가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실 노을을 보면서 노래를 들으려고 이어폰을 가방 속에 꼭꼭 챙겨 왔는데, 필요 없는 헛수고였음을. 이렇게 멋진 배경음악이 따로 있을까. 나도 어느새 빈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계단 위에 붙인 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피렌체, 붉은 기와에 내리는 노을빛, 로맨틱한 기타 연주 그리고 노을을 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피렌체에 빠져들게 만들 만한 충분한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해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언덕을 내려와야만 했다. 밤에 숙소까지 걸어서 가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아쉽지만 피렌체가 주는 황홀함을 뒤로한 채 숙소로 향했다. 사실 야경을 보는 것 까지가 내 계획이었지만, 어쩌면 야경을 봤다면 해질녘의 피렌체를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노을이 주는 감동이 너무 커서 야경을 봐도 시시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내려오는 내내 행복해 보이던 언덕 위 사람들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나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이곳에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피렌체의 노을을 선물해주겠다'라고, 그렇게 다짐했다.
요약컨대 내가 피렌체를 사랑하는 이유 첫째, 짧은 이동 거리.
둘째, 붉은색 기와지붕.
마지막, 세상 어떠한 아름다운 것들과도 견줄 수 없는 황홀한 해질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