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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곡재 Apr 10. 2022

옥인아파트

6. 산신령의 제물에 손대다

옥인아파트 사이로 난 언덕길을 끝까지 오르면 공터가 나온다. 이곳은 어린이들에게는 축구장이고, 어쩌다 꼭대기까지 올라온 택시나 트럭에게는 회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물론 1970년대는 지금처럼 집집마다 차가 없었기 때문에 늘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공터 아래에는 계곡이 있었고, 계곡을 막은 자연 수영장도 있었다. 수영장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두 갈래였는데 왼쪽은 언제나 실개울이였지만 비가 많이 왔을 때는 경사진 바위 위로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그 위로는 숲이 울창했고, 그곳에 유난히 키가 큰 아름드리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였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나무가지에는 노랑, 빨강, 파랑 색깔이 선명한 천들이 감겨 있었다. 나무 바로 아래에는 밥상 크기의 넓적한 바위가 있었고, 바위 위에는 제철 과일이 놓여 있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동네마다 신령스러운 존재로 있었던, 산신령을 대신하는 기도의 대상이었던 나무였다. 어릴 때는 왠지 그곳에 가까이 가면 안 될 것 같아 기피했던 곳이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곳은 내게 더이상 두려운 장소가 아니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가끔 동트기 전에 올라와 제물을 놓고 소원을 빌고 갔다. 


그 시절에는 과일이 무척 귀했다. 제일 먼저 나오는 딸기는 5월에나 맛을 보았고, 그리고 한두 달이 지나야나 여름 과일인 참외와 수박을 먹을 수 있었다. 이어서 포도 맛을 보고 나면 곧 가을이었고, 그제서야 사과, 배, 감 등도 먹을 수 있었다. 지금처럼 누구나 냉장고에 재어두고 먹었던 것이 아니라 어쩌다 먹을 수 있는 호사스러운 먹을거리였다. 더구나 귤은 귀한 과일이었고, 오렌지, 바나나, 망고, 메론 등은 그림책에서나 보았던 과일이었으니 과일은 후식이 아니라 특식이었다.


그런데 그 나무 아래에 가면 언제 먹을거리가 있었다. 가끔은 떡도 있었고, 과일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 음식들이 산신령에게 바친 제물로 여겨졌었는데, 고등학생이 된 후부터 경외심은 사라지고 호기심과 장난기가 발동했다. 어느 가을날 우연히 그 곳에 갔더니 탐스러운 홍시가 놓여 있었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홍시는 단풍보다 더 고왔다.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본 후, 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슬쩍 홍시를 하나 집어들었다. 잽싸게 홍시 꼭지를 따서 멀리 던져버리고는 홍시를 반으로 갈라 속살을 파먹었다. 홍시를 처음 먹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 홍시는 신비한 맛이었다. 홍시 껍질을 숲속에 버리고는 손바닥으로 입을 쓱 문지른 후 스릴감을 맛보면서 집으로 왔다.


아마도 금지된 장난(?)이었기 때문에 맛고 좋았고, 긴장감과 야릇한 흥분감도 있었기 때문에 재미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나모 모르게 발길이 그 나무 아래로 옮겨졌다. 갈 때마다 먹을거리가 놓여 있었다. 과일이 나오지 않는 시기에는 떡이 놓여 있었다. 장난으로 시작한 산신령의 제물을 훔쳐먹던 일이 이제는 상습범이 되었다. 처음하는 일은 불안하지만 두 번째 하면 당연하고 세번 째부터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법이란 걸 몸으로 느꼈다. 혼자 훔쳐먹던 것이 맘에 걸릴 때는 공범을 만들면 마음의 짐이 절반 이상 줄게 되고, 공범과는 비밀이 생겼으니 평생 깐부가 된다는 걸 누가 일러주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깨우쳤다. 나는 얼마 전에 이사와서 친구가 된 135호 광식를 불러냈다.


"뒷산에나 가볼까?"

"왜?"

"그냥..... 따라와봐."


이윽고 그 나무 아래 도착하였다.

"광식아 누가 소원 빌고 사과를 놓고 갔나 봐."

"그러게, 난 이거 처음봤는데, 바로 집 뒤에 이런 곳이 다 있었네."

"사과가 탐스러운데."


내가 사과를 하나 집어 들어 바지에 쓱쓱 문지르고는 사과를 반으로 잘라 광식이에게 건넸다.

"야, 이걸 먹으면 어떡해?"

"야, 쫄기는 먹는 사람이 주인이고 산신령이지 임자가 따로 있냐? 어차피 새나 쥐들이 먹을 텐데 사람이 먹는 게 무슨 죄가 되겠어?"

내가 먼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야, 엄청 맛있다. 역시 산신령에게 바친 사과라 그런지 맛이 달라!"

광식이는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사과를 깨물었다. 

"어, 진짜 맛있는데. 야, 근데 이거 먹어도 되는 거냐?" 

"괜찮지 않으면? 집에서 제사지내고 나면 음복하잖아? 그거나 이거나 뭐가 다르냐?"


그 후로 광식이와 나는 가끔 그 곳을 찾았고, 마치 맡겨 놓은 음식을 찾아 먹는 것처럼 제물로 바친 과일과 떡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광식이는 6동에 사는 길중이를 공범으로 끌여들였다.

길중이는 처음부터 주저하지 않고 잘도 먹었다.

"아니 이렇게 맛있는 걸 지금까지 니네 둘이서만 먹었다는 거냐? 나쁜 새끼들!"


드디어 고등학교를 졸업을 했다. 그런데 우리 셋은 모두 재수를 하게 되었다. 

광식이는 "야, 우리가 걸핏하면 산신령 음식을 훔쳐먹었으니 잘 될 리가 있냐? 재수에 옴 붙어서 셋 다 이렇게 된 거 아니냐? 어휴!"

길중이는 "야, 네가 공부 안 해서 그런거지, 임자없는 과일 좀 먹었다고 떨어졌겠냐?"

둘의 대화를 들으며 내가 말했다.

"훔쳐먹기는 내가 제일 먼저, 제일 많이 먹었는데, 그럼 난 앞으로 어떻게 되겠냐?"


다시 일 년이 지나고 셋 다 대학생이 되았다. 어느 날 셋이 모처럼 만나 다시 그 나무 아래에 가보았다. 하지만 이미 제단으로 쓰이던 넓적한 바위는 잡풀에 가려져 있었고, 알록달록한 천도 낡아 잔해만 보기 흉하게 걸려 있었다. 이곳을 늘 찾던 사람이 이사를 갔는지,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미 한참 전부터 사람의 발길이 끊긴 것을 알 수 있었다. 


벌써 40년이 지난 이야기다. 혹시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잘 될 수 있었는데 산신령의 제물을 훔쳐먹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고, 어린 날의 치기였고 만용이었다. 공범이었던 광식이는 원래 고향이 평택이었는데 결혼 후 평택에서 자리잡고 사업을 한다고 한다. 다른 공범 길중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산신령 음식을 훔쳐먹을 때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던 녀석이 무슨 세상 고민을 그리 떠안고 살았는지 스물세 해를 살고는 스스로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지금도 그 나무가 그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지 궁금하다. 만약 그 나무가 아직도 인왕산을 지키고 있다면 과일 가지고 가서 나무 아래 놓고 길중이의 명목을 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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