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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곡재 Jun 04. 2022

옥인아파트

12. 길중아 그립다

고향이 부산인 내 친구 길중이는 막내 아들인데다가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부모님 마음에 늘 걱정이었을 게다. 그래서 용돈이라도 더 주는 것이 멀리 보낸 아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기에 우리들보다는 돈이 많았다. 우리는 그저 버스 토큰을 사고 남는 돈으로 배고플 때 학교 앞 분식집에서 라면 한 그릇 사 먹으면 대만족할 정도로 늘 돈이 궁했다. 


지금이야 안경을 쓴 학생이 너무 많아 안경을 안 쓴 학생들이 억울하게도 공부를 안 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살 정도다. 하지만 내가 고딩 때는 한 반에 60명이 넘었지만 안경을 쓴 학생은 10명도 못되었다. 그런데 이 안경이 궁할 때마다 구세주가 될 줄이야.

우리는 한 해 두 해 나이가 먹으면서 용돈이 더 필요했지만 돈이 나올 구멍이 없었다. 나보다 형편이 나은 길중이도 한 달 용돈이 떨어지면 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날인가부터 길중이가 돈이 떨어지면 누군가가 주머니를 채워주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러했다.


당시 옥인아파트 집에는 연탄 아궁이가 있었다. 아파트에 연탄 아궁이가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같은, 이상한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연탄이 난방의 수단이었다. 길중이는 안경을 벗어들고 연탄 아궁이의 활활 타는 연탄불에 가까이 댄 후 열에 의해 안경테가 늘어나면 안경알만 쏙 빼냈다. 그리고는 누나에게 안경알이 깨졌다며 돈을 달라고 했다. 다른 일도 아닌, 칠판 글씨도 안보이고 책도 볼 수 없다는데 어쩔 수 없이 안경알 값을 쥐어주었다. 그러면 그 돈으로 우리들과 어울려 놀았다. 물론 물주는 길중이였다. 빼낸 안경알은 안경테를 연탄불에 다시 늘린 후 다시 감쪽같이 끼워 넣었다. 이 기발한은 방법은 계속 이어졌고, 핑계 또한 엄청 진화했다. 축구하다 깨지고, 넘어져서 깨지고, 떨어뜨려 깨지고, 친구가 밟아서 깨지고...... 이 때는 모두가 안경 쓴 길중이가 부러웠다. 우리는 새로 개봉한 영화가 있다거나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돈이 없으면 길중이를 쳐다보았다.


"야, 왜 날봐?"

"여기서 안경 쓴 사람이 너밖에 없는데 그럼 어쩌냐?"

"또 사기치라고? 니들이 친구냐 사기꾼이냐?"

"사기는 지가 알아서 먼저 치고는 한 번 더한다고 대수냐?"


길중이는 아궁이를 다시 찾아 안경알을 빼고는 또 돈을 받았고, 덕분에 우리는 영화도 보고 짜장면도 먹었다. 길중이는 성장하면서 누나네 집에서 지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우리집에 자주 왔다. 밥 때가 되면 밥도 먹고 명절이면 우리집에 와서 식구처럼 명절도 쇠었다. 


그리고 얼마나 외모에 신경을 쓰는지 앞이 뽀족한 구두를 신고 아무리 추워도 잠바는 안 입었다. 주름이 칼같이 잡힌 기지바지에 더블 단추 마이를 걸치고 다녔다. 수학을 참 잘했던 길중이는 어느 순간 공부를 놓아버렸다. 길중이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 여자친구를 사귀에 되어 청춘사업에 여념이 없었던 지라 얼굴 보기 어려웠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지방 국립사범대학에 진학하여 서울을 떠나 하숙을 했다. 핸드폰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생각하고 서로 잊고 살았다. 


여름방학이 되어 서울 집에 왔을 때 길중이는 나에게 자기 여자친구를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고 해가 바뀌었다. 나는 나대로 대학에서 새로 만난 친구들과 지내느라 서울 친구들과는 소식이 뜸했다. 그런데 어느날 길중이가 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미리 전화도 없이 무턱대고 학교로 와서 강의 시간표를 보고는 교실로 찾아온 것이다.


나를 만나러 멀리까지 와준 길중이가 무척 반가웠다. 우리는 소주도 한 잔하면서 옛날이야기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강의를 빼먹기도 했고, 내가 꼭 들어야할 수업에 가고 나면 혼자 학교 근처를 배회했다. 이렇게 닷새가 지나자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숙집에서 아침, 저녁마다 식사를 하니 주인 아주머니 눈치를 안 볼 수 없었다. 속으로 그만 갔으면 좋겠는데 계속 눌러 앉아 있을 태세였다. 그렇다고 언제 갈 거냐고 재촉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일주일 정도 지나자 나도 모르게 눈치를 주었을 테고, 길중이는 부산으로 간다며 떠났다. 길중이가 버스를 타고 떠날 때 배웅을 하면서 손을 흔들다. 그 순간은 솔직히 후련했다. 매 끼니 때마다 하숙집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돈이라도 있었으면 외식이라도 했겠지만 그 때는 버스비가 없어서 학교를 빼먹기도 했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어느날 동네 친구인 광식이가 하숙집으로 전화를 했다.

"너 길중이 소식 들었어?"

"아니, 지난 번에 여기 와서 일주일 있다 갔는데, 왜?"
"그때 무슨 낌새 없었어?"

"아니, 딱히 갈 데가 없는 눈치이긴 했지만 특별히 이상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 있어?"
"길중이가 죽었대. 동네에서 길중이 누나를 만났는데 그러더라고"

"뭐? 왜? 어떻게?"

"자세한 건 나도 모르지만 자살했다고 하더라고."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나를 찾아왔는데 하숙집 아주머니 눈치보느라 속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눈치를 주었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그런데 너는 왜 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니? 그때 네가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내게 털어놓았다면 그렇게 가진 않았겠지? 네가 떠난 후 나는 지금까지도 네게 죄를 진 것처럼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종종 네가 떠오를 때면 마음이 아프단다. 


"길중아 정말 미안하다!" 네가 떠난 지 4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네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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