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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곡재 Jun 04. 2022

옥인아파트

13. 내 친구 광식이 잘 사니?

광식이는 고2가 시작될 무렵 우리 아파트로 이사 왔다. 당시 남학생의 겨울 교복은 아래위 새까만 색에 목깃이 낮고 둥근 전국 통일의 디자인이었다. 깃에 한쪽은 로마 숫자를 부착하여 학년을 표시하고, 다른 한쪽은 학교를 나타내는 배지를 부착했다. 그리고 챙이 넓은 검은색 모자를 써야 했다. 그러나 모자부터 신발까지 규정대로 하고 다니는 학생들은 대단한 모범생이었고, 대부분 어딘가 한두 군데는 규정 위반이었다. 규정을 위반하면 할수록 멋진 것이라는 반사회적(?) 생각이 대세였던지라 누구나 제한된 범위 내에서 멋을 부렸다. 어떤 학생은 규정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학생을 우리는 날라리라고 했다.


고등학교 남학생들의 생활은 아직 동물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동네에 낯선 이가 나타나면 우선 눈빛으로 기선을 제압하려 한다. 광식이는 이사 올 때부터 복장이 남달랐다. 바지는 당꼬 바지(발목이 좁은)로 유행하는 것보다 더 폭이 좁았고, 머리는 짧은 스포츠형 학생 스타일보다 더 길었고, 윗옷 맨 위 단추는 채우지 않은 채 모자는 머리가 눌릴까 봐 쓰지도 않았다. 게다가 가장 인상적인 것은 콧수염을 적당히 길러 코밑이 시커멨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광식이를 마주치는 순간 동네 친구들은 모두가 "쟤 좀 노나 보네. 언제 한 번 얘기 좀 해야겠어."라고 했다.


그 언제가 실현되는 날이었다. 초딩 때부터 함께 자란 동네 친구들 몇이 아파트 뒷길(계곡을 끼고 라 오는 길)에 모여 광식이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야, 거기 너 이리 좀 와봐라"

광식이는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더니 잠시 후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 좀 같이 저쪽에 가서 얘기 좀 할까?" 하고는 산으로 올라갔다.

광식이 입장에서는 새로 이사 온 동네에 신고식을 치르는 것이었으니 자존심도 무척 상했을 게다. 학교는 어디 다니고 언제 이사 왔고 등등 시시콜콜한 질문이 이어지고, 함께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동질감을 확인했다.


나와는 같은 1동에 살았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보다 금방 가까워졌다. 광식이는 원래 집이 송탄인데 서울로 유학을 와 누나와 둘이 3층에 살았다. 다른 집은 전 가족이 모여 사는데, 광식이의 서울 유학을 위해 따로 집을 살 정도였으니 경제 사정이 우리보다 훨씬 좋았다. 광식이 집에 놀러 가면 외제 제품이 많았고, 먹는 음식도 양식집에서나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싸구려 소시지가 아닌 햄, 베이컨, 치즈, 참치 등등 내가 평소에 먹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 난생처음 보는 것들도 있었다.


광식이가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멀쩡하게 있다가 갑자기 집에 다녀온다고 휙 다녀오기도 하고, 밥 먹을 시간이 되어 같이 먹자고 하면 굳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집으로 갔다. 처음 한 번은 예의상인가 보다 했는데,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갑자기 휙 집에 다녀온 이유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였다. 당시 우리 집 화장실은 좌변기가 아니라 쭈그려 앉는 양변기였기 때문에 광식이 입장에서는 불편했을 터였다. 그리고 밥을 먹지 않고 집으로 간 이유는 김치나 돼지고기 기름이 둥둥 뜬 찌개류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광식이네 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늘 햄이나 소고기 반찬이었고, 누구네 집에서나 흔히 먹는 밑반찬이 없었다.


고3 겨울 졸업이 한 달 남짓 남았을 때, 같은 1동에 살던 옥주라는 여자 친구가 자기 친구들을 소개해 준다고 하여 광식이와 나는 미팅을 하게 되었다. 그 여학생들은 상고 졸업반이었기 때문에 신분은 학생이었지만 현장 실습을 하고 있던 중이라 퇴근 후 저녁 시간에 만났다. 착하고 예쁘장한 그녀들과 자주 만났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을뿐더러 지나다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그녀들은 당시 00번(**운수로 기억) 버스 종점에서 근무했다. 하는 일은 토큰을 세어 장부에 기록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외에도 다른 일을 했겠지만 실습생이었으니 중요하거나 복잡한 일은 시키지 않을 것이다. 당시에는 버스마다 안내양이 있었는데, 버스가 종점에서 출발하여 다시 종점 차고로 돌아오면 승객이 버스요금으로 지불한 현금이나 토큰을 담은 통을 회사에 제출했다. 그녀들은 이 통을 받아 현금과 토큰을 분리한 후 각각 얼마인지를 기록하고 자신이 근무하는 동안 받은 금액을 정산하는 일을 했다. 광식이와 나는 그녀들과 가까워지자 23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그녀들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건너편 다방이나 빵집에서 기다리다 보면 그녀들이 나왔다. 만날 때마다 그녀들은 어디선가 토큰을 한 줌씩 꺼내 몰래 우리에게 주었다. 토큰을 사서 줄 리는 없고, 안내양이 제출한 토큰 일부를 슬쩍한 모양이다. 우리는 눈치로 알고 았었지만 굳이 출처를 묻지 않고 받아 썼다. 한두 번으로 끝났기에 망정이지,  아마 꼬리가 길었다면 영락없이 사주범이거나 장물아비가 되었을 게다.


현금도 아니고 토큰을 어디에다 쓰는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 것 같아...... 우선 토큰은 버스를 탈 때마다 한 개씩 지불한다. 한 개의 가격이 50원쯤(당시의 버스비) 했다. 지하철이 지금 같지 않았던 그때 최고의 교통수단인 만원 버스에서 현금을 내면 거스름돈을 주고받아야 하니 출퇴근 복잡한 시간에 토큰을 사용하면 승객과 안내양 모두에게 편리했었다. 토큰은 교통비 이외에도 학생들이 드나드는 곳 어디서나 환영받았다. 토큰은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고도, 빵집에서 빵을 먹고도, 튀김을 사 먹고도 돈과 마찬가지인 결제수단이었다. 심지어 다방이나 포장마차, 당구장에서도 토큰을 받았다. 토큰이 한 주먹씩 생긴다는 것은 우리가 갈 데가 많아진다는 뜻이고 혈기왕성한 그때 할 일이 더 많아졌다는 걸 의미했다. 그녀들 덕분에 주머니 사정이 잠시 넉넉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절도 방조, 장물 처리 등의 범죄행위였으니 결코 웃을 일은 아니다.

 

광식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멋쟁이가 되었다. 어깨를 덮는 긴 머리에 밝은 색상의 옷을 아래위로 맞춰 입고는 노란색 자동차 폭스바겐을 몰고 다녔다. 나이트클럽을 순례하며 여자들과 어울려 다녔기 때문에 나와는 성향도 수준도 맞지 않았다. 나는 광식이가 놀다 지쳐 피곤해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서로 입대 시기가 달라 한동안 만나기 어려워졌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한 후에는 더욱 만나지 못했다. 광식이는 고향으로 가서 가업 중 하나를 물려받아 운영한다며 떠난 후 가끔 전화통화만 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이마저도 끊겼다. 지금은 어디서 나처럼 늙어갈까?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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