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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곡재 Jun 18. 2022

옥인아파트

14. 세차의 달인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어느 날 정기적금을 홍보하는 은행원들이 학교에 왔다. 그때는 소비가 미덕이 아니라 저축이 미래를 준비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뉴스에서도 책에서도 학교에서도 절약하는 습관을 길러 저축을 많이 하자는 것이 국가 전체의 목표와도 같았다. 매년 연말이면 올해의 저축왕을 뽑아 상을 주기도 했다.


당연히 나도 교육의 효과 덕분인지 저축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월 300원을 납입하는 정기적금을 들었다. 중학교 졸업할 때 약 1만 원의 거금을 받아 고등학교 학금에 보태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 달에 고작 300원을 저금하느냐고 웃겠지만, 그때 300원이면 졸업식이나 집안 행사 때에나 구경할 수 있었던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용돈이라고 해야 어쩌다 심부름하고 남은 잔돈 몇 푼, 또는 친척 어른들이 가뭄에 콩 나듯 쥐어준 돈이 전부였기에 용돈을 모아 달 300원씩을 저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야기는 저축에 대한 것이 아니니 이쯤 하고. 당시 우리 학교에 왔던 서울은행(현재의 하나은행과 합병)의 직원이 있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었다. 우연히 잡지를 보다가 탁구선수들이 경기를 하는 사진을 보았는데, 그 은행 직원이 전직 탁구선수였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매달 적금을 받으러 학교에 오는 그 사람에게 아는 척을 한 적은 없었지만 몇 년이 지난 후 동네에서 마주쳤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누구지? 곰곰이 생각하니 중학교 때 학교에 왔던 탁구선수 출신 은행원이었다. 같은 1동, 136호에 이사를 온 것이다. 항상 깔끔한 복장에 흐트러짐 없는 헤어스타일까지 은행원이라기보다는 군인이나 공무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 분이 1990년쯤 자동차를 구입했는데 그 차가 바로 지금 현대 소나타의 원조였다. 당시는 대부분 브리사, 포니, 프라이드 등 소형차가 많았었는데 중형에 가까운 소나타를 아파트 앞에 주차해 놓으면 모두가 부러운 시선으로 차를 한 번씩 쳐다보곤 했다.


1988년 올림픽이 지난 후 우리나라 각 세대마다 자가용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옥인아파트는 지어질 때부터 주차장 공간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늘 주차가 늘 문제였다. 주차 문제도 문제이지만 주차의 위치에 늘 신경이 쓰였다. 나도 운이 좋게 20대에 차를 갖게 되었는데, 주차할 때마다 주위를 살펴야 했다. 바로 그 아저씨의 소나타 옆자리를 피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136호 아저씨는 오직 차를 위해 태어난 분 같았다. 우선 일찍 퇴근한 후 1동 앞, 다음 날 나가기 가장 좋은 위치에 주차를 했다. 그리고는 차를 관리하기 시작한다. 내 눈에는 엄청 깨끗하게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차를 꼼꼼하게 닦는다. 차 외관을 닦을 때도 엄첨나게 심혈을 기울인다. 와이퍼를 분리해서 유리의 빗물을 닦아내는 고무 부분의 먼지를 닦아낸다. 차 문의 손잡이, 범퍼도 깨끗하게 닦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매일 운행하는 차의 바퀴를 닦는다는 것이다. 바퀴의 먼지를 다 털어낸 후 걸레로 한 번 더 닦는다. 그리고는 칫솔에 구두약을 묻혀 바퀴를 골고루 문지르고 다시 마른걸레로 광을 낸다. 마지막 마무리는 자동차에 붙어있는 차 이름의 영문 부착물을 솔로 닦아낸다. 이외에도 자동차를 신줏단지 모시듯 마치 종교활동을 하는 것처럼 관리한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자동차에 호를 씌운다. 독일에서 동네 사람들이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 아저씨 차에 호가 씌워져 있는지를 보고 날씨를 알았을 정도이다. 어쩌다 하루는 그냥 넘길 법도 한데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만 빼고 매일 반복한다. 차에는 먼지 한 톨조차 없어 더 이상 닦을 곳이 없어 보여도 세차의 과정은 매일 반복되었다. 그래서 그 아저씨의 차는 언제나 광이 번쩍번쩍 나고, 파리도 모기도 미끄러질 것 같이 완벽 그 자체였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은 그 아저씨가 차를 닦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간혹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새 차인 그 소나타 옆에 차를 세우면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금방 새로 뽑은 차가 아니라면 그 어떤 차라도 136호 아저씨 차 옆에 서는 순간 어딘가 낡아 보이고 지저분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차가 조금 더러워 보이는 것이야 그렇다 치지만 차 주인이 게을러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자신의 차가 136호 차보다 깨끗하지 못한 게 자신의 근면성, 성실성이 부족해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누구나 그 차 옆에는 주차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같은 1동에 살기도 했지만 퇴근 후 직장 동료들과 어울리다 보면 늘 귀가가 늦었다. 당연히 주차 자리는 없고, 항상 그 아저씨 차 옆에만 공간이 남아있었다. 하는 수없이 그 옆에 차를 대고는 얼른 집으로 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 차를 보면서 "111호 차는 왜 이렇게 지저분해?"라고 한 마디씩 했을 것이다. 사실 내 차도 그리 더러운 건 아닌데 언제나 새 차인 136호 차 옆에만 서면 더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덤으로 나는 늘 게으른 사람이 되었다.


옥인아파트가 철거된 후 주민들이 이사 갈 곳은 네 군데로 정해졌다. 상암동, 내곡동, 강일동, 마천동에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선택을 했겠지만 우리는 마천동을 선택했고, 136호 아저씨는 강일동을 선택했다고 들었다. 머리만 하얗게 변해 있을 그 아저씨가 오늘도 차를 닦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저씨가 언제까지나 차를 전처럼 때 빼고 광내시길 빈다. 그건 그 아저씨가 건강하시다는 증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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