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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곡재 Jun 19. 2022

옥인아파트

8. 대한민국 최초의 마을버스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의 교통 체계와 도로 상황은 선진국 수준이다. 서울 시내 웬만한 곳은 지하철이 닿고, 지하철이 닿지 않는 곳은 버스가, 버스가 닿지 않는 곳은 마을버스가 다닌다. 게다가 자전거 도로까지 잘 정비되어 있다. 그리고 1970년대 전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10년만 지나면 마이카 시대가 온다'는 말이 조금 늦어  20년이 지나서야 실제로 실현되었지만, 지금은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으니 이동 수단에 대한 걱정은 없는 셈이다.


1970년대에는 이사를 갈 때 가장 먼저 따져봐야 할 중요한 지리적 포인트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버스정거장, 시장, 학교가 집에서부터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입지조건의 좋고 나쁨이 결정되었고, 그에 따라 집값도 달랐다. 지금은 지리적 포인트가 버스정거장이 지하철역으로, 시장이 대형마트로, 그냥 학교가 입시 성적이 좋은 학교로 바뀌었으니 내용적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변한 게 없다.


먹고살기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서울로 밀려왔던 그 시기에는 서울 어느 산이나 기슭마다 판잣집이 들어서 있었다. 또한 교육열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세계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전인자도 한 몫했을 것이다. 내가 옥인아파트에 살았을 때만 해도 아파트 동쪽으로 판자촌이 있었다.


옥인아파트의 위치는 주소가 산 3번지인 것만 봐도 산동네였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집에 다녀 간 친척이나 지인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옥인동 아파트는 공기도 좋고, 조용하고, 계곡에 숲까지 그야말로 멋진 곳이지. 근데 산꼭대기라 한 번 가려면 등산을 해야 한다니까!"

그랬다. 우린 매일 아침에 내려갔다가 저녁에 올라오는 산동네 주민이었다. 학교 갔다 올 때마다 언덕길을 오르면서 허기를 참아야 했고, 시장에서 산 물건을 들고 올 때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마을버스다. 옥인아파트 마을버스는 대한민국 최초의 마을버스였기 때문에 처음 개통하던 날 방송국에서 기자와 촬영기사가 나와 운행 과정을 촬영하였고, 9시 뉴스에도 보도되었다. 마을버스 크기는 지금과 비슷했지만 색깔은 빨간색을 많이 써서 전체적으로 붉게 보였다. 노선은 아파트를 출발하여 큰 길가 버스정거장, 세종문화회관 앞, 코리아나호텔(옛날 국제극장) 앞을 지나 시청 분수대(광장)를 돌아 현재의 프레스센터 앞, 교보문고 앞을 거쳐 다시 아파트로 되돌아갔다. 물론 효자동 사거리에서 누상동 옥인동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에서도 몇 차례 섰다. 그때는 차가 많이 없었던 시기라 30분이면 아파트에서 시청을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배차 간격이 출퇴근 시간에는 30분, 낮에는 1시간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놓치면 걸어가거나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아침에는 주로 등교하는 학생과 출근하는 사람들이 이용했고, 낮에는 시장 보는 아주머니들이 이용했다. 


배차시간이 길다는 불평을 해소하기 위해 버스를 2대로 늘렸다. 그런데 아파트 사람만 미을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랫동네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었다. 처음 개통할 때는 규정 때문이었는지 기사와 조수가 있었다. 기사와 조수는 매일 이용하는 아파트 주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동네 사람의 이용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아파트에 살더라도 이용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했는데, 방법은 이용하는 가구마다 식구수대로 신분증 같은 이용권을 지급하였다. 처음에는 이용권을 보여주고 탔는데, 나중에 서로 얼굴이 익은 후에는 눈인사만 하고 그냥 타도 되었다. 


동네 좁은 길을 급히 운행하다 보니 크고 작은 사고도 있었다. 지금은 마을버스의 종점이 수성동 계곡 아래이고, 마을버스도 여러 대이고, 마을버스가 대기하는 곳도 연립주택 앞 삼거리이다. 하지만 그때는 아파트 주민만 이용할 수 있었기에 아파트 9동과 4동 사이의 좁은 공간 비탈길이 종점이었다. 한 번은 주차 브레이크가 풀려 마을버스가 굴러 내려가다 전봇대를 들이받고서야 멈춘 일도 있었고, 운행 중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가 마을버스에 치여 사망한 적도 있었다. 이 사고로 기사분이 한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마을 주민들이 모두가 반갑게 맞이했던 기억도 난다.


이런저런 사유로 민원도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아파트 사람만 타는 마을버스가 골목길을 달리니 위험한 상황도 발생할 수 있고, 소음도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문제인 것은 아래 동네 사람들이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마을버스로 바뀌었다. 그 대신 아파트 비탈길이 아닌, 지금의 연립주택 앞 삼거리가 종점이 되었고, 이용권 때신 탈 때마다 현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09번 번호를 달고 달리는 진정한 마을버스로 거듭났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해에 마을버스가 개통되어 중학교 3년 내내 세종문화관에서 내려 걸어서 등교했고, 고등학교 때도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내려 다른 시내버스로 환승 후 등교했다. 그 후에도 매일 마을버스를 이용하여 외출했었으니 옥인아파트 주민의 역사는 마을버스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참, 옥인아파트 마을버스가 생긴 후 삼청동에서 시청 앞까지 왕복 운행하는 마을버스가 생겼다. 지금의 교보빌딩 앞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다 보면 옥인동과 삼청동으로 가는 버스가 서는데, 집에 오는 손님들 중에 더러는 삼청동행 마을버스를 탄 후 한참을 헤매다가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불편했던 점도 있었다.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람들인지라 탈 때마다 내릴 때마다 인사하기 바빴다. 혹시라도 동네 어른들께 인사를 안 하거나 행동을 잘못하면 "몇 호네 걔는 영 버릇이 없고 엉망이야!"라는 소리가 돌곤 했다.


마을버스에서 대형 실수를 저지른 일도 생각난다. 1동에 살던 친구 광식이는 대단히 멋쟁이였다. 머리카락도 약간 갈색인 데다가 어깨 아래까지 길게 기르고는 미용실에 자주 들러 다듬고는 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미용실에 가는 게 이상해서 늘 이발소를 이용했었는데 말이다. 한 번은 마을버스에 탔는데 광식이가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래 줄 요량으로 뒤에서 머리카락을 조금 세게 잡아당겼다. 동시에 "아악!" 비명소리가 버스 안에 메아리쳤고 버스에 탄 사람들의 눈이 쏠렸다. 그런데 '아뿔싸!' 비명소리가 여자 목소리였다. 그랬다. 광식의 헤어스타일 일과 너무나 닮은 아가씨였다. 일이 수습이 안되었다. 놀란 아가씨에게 광식이 어쩌고 저쩌고 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죄송합니다" 하고는 버스에서 빛의 속도로 내려 고개를 숙이고 튀는 게 상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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