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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곡재 Mar 12. 2022

옥인아파트

1. 회상

어느날 밤 10시가 지난 시간, 사직공원 부근의 B여자대학 야간부 강의를 마치고 대학 정문에서부터 내리막길 주택가 골목을 빠져나와 시장 골목길로 들어섰다. 시장길 안 삼거리를 조금 앞두고는 '곧장 갈까, 곧장 가면 길도 좁고 사람도 많으니 우측 골목으로 빠져 큰길로 갈까' 망설이며 걷고 있는데 누군가 이름을 부른다.

"형철아!"
"어! 이게 누구야 너 태지구나!"

"너하고 비슷해서 혹시나 하고 이름을 불러 봤는데, 맞네! 오랜만이다. 여기는 웬일이냐?" 지태는 키는 크지 않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부진 몸에 큰 눈을 껌벅이며 반갑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악수하는 손이 아플 정도로 손힘이 세다. 

"태지야, 너 아직 이 동네 살아?"

"아니야, 이 동네 뜬 지 오래지. 결혼하면서부터 청구역 근처에 사는데, 저기 보이는 수퍼에서 일해"

"그렇구나! 그럼 수퍼 사장님?"

"사장은 무슨... 친구 건데 잠깐 도와주는 셈 치고 배달도 하고 힘쓰는 일 하고 있지. 너는?"

"난 거여동에 살아. 5호선 종점 근처."

"야, 반갑다. 이쪽에 오면 미리 연락해. 소주라도 한잔 해야지."

"그래그래. 오늘은 늦었고, 다음에 보자." 다시 한번 악수를 하고 돌아섰다. 

내가 이 친구 전화번호를 알고나 있나? 언제 한번 보자는 약속이 얼마나 공허한가?


헐레벌떡 오른 지하절, 빈자리에 앉아마자 핸드폰을 꺼내 김태지 세 글자를 검색한다. 번호가 뜬다. 오래전에 문자도 주고 받았다는 걸 알았다. 맞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무슨 부동산을 한다면서 돈 있으면 땅에 투자하라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부동산 일이 틀어졌나 보군! 

피곤이 몰려온다, 눈을 감으니 잠은 오지 않고 자꾸 옛날 친구들 얼굴이 떠오른다. 강길중, 홍범희, 권순석, 강은순, 김광식......


내가 옥인아파트에 이사온 건 1973년 가을이었다. 서울에 처음 이사왔을 때는 한강대교가 내려다보이는 노량진 부근 언덕 꼭대기에 있는 8평짜리 아파트에 살았다. 인천 제물포 근처 마당이 있는 기와집에서 살았던 내게 집 위에 집이 있는 아파트라는 건물이 무척 신기했었다. 3년쯤 달랑 방 2개뿐인 좁은 집에서 살다가 18평 옥인아파트로 이사왔을 때는 대궐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노량진 아파트는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어서 공중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는데 새로 이사온 집은 집안에 화장실이 있었다. 정말 마술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엌도 크고, 화장실에는 시멘트에 타일을 붙인 욕조까지 있었고, 무엇보다도 방이 3개였다는 것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옥인아파트는 지금의 경복궁역에서 자하문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보이는 인왕산을 향해 계속 가다보면 급격한 언덕길이 나타나고, 그 언덕길 양쪽에 회색빛으로 서 있는 아홉개 동의 건물이었다. 인왕산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에는 산등성이를 따라 아래부터 8동, 7동, 6동, 5동이 높이가 다르게 줄지어 있었고, 왼쪽으로는 계곡을 따라 아래부터 9동, 4동, 3동, 2동이 줄지어 있었다. 이 사이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비교적 넓은 공터가 나타난다. 이 공터에서 올라온 길을 돌아보면 아랫동네 집들의 지붕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산을 바라보면 파란 하늘 아래 우뚝 선 바위산이 무척이나 장엄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교가가 "장엄한 인왕산을 이웃하고서 아늑히 자리 잡은 우리 배움터"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 집은 그 공터에서 왼쪽 계곡 위 다리를 건너면 1동 건물인데, 1동에서도 맨 끝 계단을 올라야 했다. 옥인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아파트였는데 언덕을 따라 지었기 때문에 실제는 6층도 있었고 반지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건물이나 옥상에 오르면 서울시내가 다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전망을 자랑했다. 아파트 뒤 위쪽으로는 인왕산 허리를 가로지는 스카이웨이가 있었다. 그 스카이웨이를 경계로 위는 군사지역이었고, 아래는 민간지역이었다. 결국 옥인아파트는 경복궁에서 바라본 인왕산 기슭에서 민간인이 살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역에 있는 산동네였다.


봄이면 꽃이 이어달리기를 하듯 시차를 두고 활짝 폈다. 제일 먼저 진달래가 만발하여 인왕산을 붉게 물들이면 이에 뒤질세라 노란 개나리가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는 벚꽃이 이불 솜을 널어 놓은 듯 산을 하얗게 치장했다. 잠시 주춤했던 꽃싸움은 은은한 아카시아 향기로 다시 시작되어 온산에 하얀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렸다. 장마가 지고 뜨거운 여름이 한풀 깎일 즈음 스카이웨이를 따라 형형색색의 코스모스가 바람에 한들거렸다. 가을이면 저마다 고운 빛깔로 물든 단풍이 신비로웠고, 겨울에는 산의 속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함박눈이라도 내리는 날에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네 계절 어느 때라도 정말 아름다운 동네였다.


어디 그뿐인가! 철이 바뀔 때마다 온갖 곤충들과 새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매미소리는 한여름 뜨거움을 식혀주는 나무의 휘파람 같았고, 여치는 밤마다 처량함에 대해 노래하였고, 귀뚜라미는 사라지는 낭만이 안타까워 밤마다 울어댔다. 때까치는 때가 되면 시끄럽게 울었고, 뻐꾹새 소리는 동화 속 나라에서 들려오는 듯 했고, 꾀고리는 이름만큼 예쁘지 않은 소리를 내며 종일 분주하게 날아다녔다. 게다가 계곡의 물소리는 여름 내내 끊이지 않는 도심 속의 숲이었다.


여름날 소나기라도 한바탕 내리면 계곡에는 금세 급류가 휘돌아내려가고, 다음날엔 어김없이 수영장이 생겼다. 낮에는 꼬마들이 더위를 식히고, 차디찬 계곡물에 입술이 보랏빛으로 물들면 1동 뒤 치마바위 위에 드러누워 뜨거워진 바위열로 추위를 달랬다. 그리고 밤이면 까까머리 중고생들이 어둠속에서 물장구를 쳤다. 계곡에 물이 불면 송사리 잡이도 하고 가재도 잡고 개구리도 잡았다. 산딸기 따러 산속을 헤맸고, 버찌를 따먹고 아카시아꼿을 먹으며 신나게 놀았다. 낙엽이 떨어질 때면 팥배를 따먹으며 겨울을 맞이했다.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곳, 청와대 푸른 지붕이 보이는 곳에 살고 있지만 서울살이가 아닌 산골살이였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어서 그 아름다움 뒤에는 모두가 참고 견뎌야 했던 고단함도 있었다. 버스에서 내여 20분은 등산을 해야했다. 가까운 시장까지 빠른 걸음으로 왕복 30분,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등산코스였다. 더구나 무거은 짐이라도 옮길라치면 중노동이 따로 없었다. 여름날 수박이라도 한 덩이 먹으려면 생고생을 해야했다. 토요일 학교에서 돌아올 때 배가 등에 달라붙은 고통을 참으며 한발한발 고행의 산길을 올라야 했다. 1970년대 그때는 월동준비로 가장 중요한 것이 집집마다 연탄을 수백장씩 쌓아놓는 일이었다. 문제는 연탄 성수기에는 연탄집에서 배달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온 가족이 연탄을 날라야했다. 공휴일로 하루 날을 잡아 식구 총동원령을 발동하여 연탄을 날랐고, 김장 때는 또 다시 식구가 총동원되어 배추와 무를 날랐다. 밤새 함박눈이 내린 후 학교가는 길은 요즘 스키장을 방불케 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미끄럼틀 타듯 내려갔지만 어른들은 엉거주춤 내려가다 한두번 엉덩방아를 찧고서야 겨우 언덕길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옥안아파트에서 살던 시절이 가장 좋았던 이유는 따로 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가슴 저리게 그리운 이웃의 정이다. 지금처럼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아랫집에서 소음이 난다고 항의할까 불안해 하는 그런 아파트살이가 아니다. 내가 살던 1동에만 33가구인데, 몇 호라고 하면 그 집 식구가 몇이고 아이들은 몇 학년이고 아저씨 직업은 뭐고 할 거 없이 속속들이 너무나 잘 아는 동네였다. 밥중에만 문을 닫을 뿐 어느 집이나 낮에는 문이 열려 있는, 그래서 엄마가 외출하면 이웃집에서 밥을 챙겨주기도 했던 그런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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