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듬, 각얼음
“투명하게 안이 보이는 가게” 안에서 ‘소녀’가 누군가의 발톱을 꾸미고 있다. 우리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손바닥에 발을 올린다”. 현대인은 인간적인 감정 없이도 각얼음 같은 공간 안에서 필요에 의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지하철역 앞에서 현대인은 서로의 “앞발”을 흔든다. 무표정한 전송(餞送)이다.
인사를 마친 현대인들은 네모나고 딱딱하다. 각얼음처럼 서늘해진 채로 계단을 내려간다. 지하의 꿉꿉한 공기는 마치 냉기처럼 지하철을 기다리는 모두에게 스며든다. 이미 그 불쾌함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발을 까닥이며 지하철을 기다릴 뿐이다. “모두/탁한 대기처럼/결국에는 심연으로 통한다”.
얼음 틀 같은 지하철이 도착한다. 각얼음 같은 현대인들이 마구 올라탄다. 자발적으로 그 안에 갇힌다.
무표정(無表情). 아무런 감정도 얼굴에 드러나 있지 아니함. 또는 그런 얼굴 표정. 김이듬 시인은 이 전송(餞送)이 정말 무표정한지를 묻고 있다.
무표정은 어쩌면 ‘바램’을 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시인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바램’을 가질 수 있다고 얘기한다. “얼음이 든 컵에 콜라를 따르”는 것만큼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바램은 실체가 없다. 그래서 어떤 표정을 지을 수도 없다. 무표정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닌, ‘예정되지 않은 것’이다.
시는 현대인에게 ‘바램’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를 바랄 수 있게 하는 것. 표정을 지을 수 있고 ‘감정’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 현대인에게는 그런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