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 주상절리길 이야기
우리 부부는 집에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가볼 만한 곳' 알아보는 게 귀찮아 목적지도 정하지 못하고 차에 오를 때가 있다. 그럴 경우 동서남북 중 어느 방향으로 출발할지를 먼저 정한다. 네 가지 중 하나를 정하는 건 그나마 쉬운 일이다. 사지선다의 답이 정해지면 무작정 출발한다.
아이들 역시 늘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고 부모를 따라나섰다. 그런 아이가 사춘기에 임박할 만큼 자라니 자기주장을 말하기 시작했다. 산이나 강, 바다가 아닌 도시에 가고 싶다고. 우리가 사는 곳이 도시인데 말이다. 힘든 게 싫은 모양이다. 시원하게 에어컨이 나오는 곳에서 예쁜 것을 구경하고 싶을 나이다. 나는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며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집을 나섰다. 나 역시 오랜만에 도시에서 쇼핑이 하고 싶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크록스도 챙겼다. 바다나 계곡에 가게 된다면 발이라도 물에 담그기 위해서다. 마음은 쇼핑몰에 가고 싶어 원피스를 입고 출발했지만, 아직 목적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남편이 쇼핑은 밤에 하자고 권했다. 날이 이렇게 좋으니 먼저 자연을 보길 원했다. 그래서 두 가지 욕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목적지를 찾아냈다. 바로 철원의 '한탄강 주상절리 길'이다. 철원에 가서 자연을 감상하고 집에 오는 길에 근처 아울렛을 다녀올 생각이다. 검색한 주상절리 사진을 보니 절벽을 따라 만든 잔도길이 멋있었다. 수려한 경치를 감상하며 걷을 수 있게 다리를 놓아 만든 길이었다. 3.6 km의 길을 편도 1시간~ 1시간 반 정도 걷는 코스라고 했다. 이렇게 간단히 정보를 습득한 후 철원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렸는데 쏟아지는 뜨거운 햇볕이 심상치 않다. 사람들이 양산을 들고 입구로 향하기에 우리도 차에 있는 우산을 챙겼다. 매표소에 갔더니 입장권을 50% 할인해 주었다. 돈을 아낀 것 같아 기뻤다. 직원분께서 중간에 매점이 없으니 물을 꼭 챙겨가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이것이 앞으로 펼쳐질 여정의 복선이었다.
50%나 할인해 주는 이유!
곧 알게 되었다.
한 시간 이상 걸어야 해서 나는 신고 온 플랫 슈즈를 벗고 크록스로 바꿔 신었다. 차에 있던 책가방에 물도 챙겼다.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크록스를 신은 후 책가방을 짊어졌다. 언밸런스한 패션을 뽐내며 기대감을 갖고 잔도길로 접어들었다.
시원한 나무 그늘 길을 통과하니 눈앞에 숨이 턱 막히는 멋진 광경이 펼쳐졌다. 울창한 나무숲의 협곡 사이로 한탄강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런 풍경을 따라 잔도가 놓여있었다. 절벽을 따라 굽이굽이 연결된 다리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다리는 철망 구조라 아래가 훤히 보였다. 게다가 발아래는 낭떠러지다. 스릴까지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곳이다. 남편과 나는 자연이 만들어낸 절경에 감탄하며 길을 걸었다.
그런데 햇볕이 너무 뜨겁다. 6월 초인데 기온이 28도였다. 한여름 날씨다. 그늘이 없어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 잔도 바닥의 구멍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앗! 원피스를 입은 나는 순식간에 마릴린 먼로가 되었다. 반사적인 신경반응으로 재빨리 날리는 치마를 부여잡았고 옆에 있던 남편도 빠르게 도왔다. 추한 꼴은 면했지만 앞으로 문제다. 갈길이 먼데 잘 걸어갈 수 있을까? 아름다운 풍경도 사진에 담고 싶었다. 한 손엔 핸드폰, 한 손엔 치마를 잡고 엉거주춤하게 걸었다. 아이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간다. 다리 아래가 낭떠러지라 곳곳에 ‘핸드폰 추락 주의’ 경고판이 붙어있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핸드폰을 잡은 손에 꼬옥 힘을 주었다.
그렇게 천천히 걷고 있는데 아이들을 따라 앞서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애들이 더위에 지쳐서 투덜거린다는 것이다. 빨리 와서 도와달라는 SOS 전화였다. 나는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양손으로 치마를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속도를 내며 걸으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낭떠러지 아래의 시원한 물속에 풍덩 빠지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협곡 사이의 물소리가 크게 울리며 귓속을 파고들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만 손이 닿지 않는 오아시스를 목전에 둔 기분이었다.
아이들과 만나 위치를 살펴보니 총 3.6KM 중 1.1KM를 걸어왔다. 되돌아갈까? 앞으로 펼쳐질 길이 궁금했지만 어른과 달리 멋진 풍경엔 관심이 없는 아이들에게 고행길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산수법이 나를 설득했다. 되돌아가도 1.1KM는 걸어야 한다. 전진해서 1.1KM를 걸어간다면 남은 길 역시 약 1KM 정도다. 조금만 힘을 내면 출구에 도착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곳엔 카페도 있다고 했다. 입장료를 50%나 할인해 준 매표소에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사용할 수 있는 쿠폰도 주었다. 이 쿠폰으로 카페에 가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후퇴하면 손해다. 쿠폰까지 알뜰하게 챙겨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전진만 하자.
아이들에게는 저 멀리 보이는 출렁다리를 가리키며 저기까지 가면 출구에 가까워진다고 말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도착하면 너희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사 줄 테니 힘을 내서 이 더위와 싸워 보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남은 2.5KM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길은 잔도와는 달리 산길을 따라 만든 나무 데크와 계단으로 이어졌다. 길만 데크일 뿐 등산과 다름없었다. 대충 습득한 정보로는 전부 평지인 줄 알았는데 계단으로 된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이래서 꼼꼼한 검색이 필수다. 남편은 둘째를 데리고 앞서 갔다. 화가 잔뜩 나 ‘본인이 내밀 수 있는 최대치까지 입을 쭉 내민’ 12살 딸은 내가 맡았다. 남편과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 아이들이 함께 있으면 ‘만담 콤비’처럼 투덜거림을 하나씩 공유하다가 그 크기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이다. 딸은 ‘앞으론 엄마가 가자는 곳은 절대 안 가. 난 이제 집에 있을 거야. '등. 판소리의 추임새 마냥 툭툭 속마음을 내비치며 걸었다. 미안하다. 엄마도 이렇게 더울지 몰랐단다.
드디어 다리에 도착했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출구가 보이지 않자 딸이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나는 등산할 때면 내려오는 분께 정상까지 남은 거리를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럼 그들은 하나같이 곧 도착하니 힘을 내 보라며 선의의 거짓말을 해준다. 그분들처럼 나도 아이들에게 ‘곧 도착’이라는 희망고문을 해보았다.
그러나 더 이상 엄마의 말을 신뢰할 수 없게 된 딸은 쭉 내민 입에 머물던 불만을 발 끝까지 보내버렸다. 화가 나 발을 툭 내디뎠는데, 그만 신고 있던 크록스가 날아가버렸다. 그렇게 신발 한 짝이 난간을 넘어 산 아래로 떨어졌다.
갑자기 닥친 위기에 사태는 전환을 맞이했다. 더위가 문제가 아니다. 조난당한 크록스를 구해야 한다. 다행히 이 길은 낭떠러지가 아니었다. 손이 가제트 팔처럼 길어지면 좋겠다. 식당에서 신발 정리할 때 사용하는 긴 집게가 있다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난간을 넘어가면 신발을 찾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해 근처에 달려있는 CCTV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까 지나온 쉼터에 직원 분인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그분께 도와달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때 딸아이가 난간을 넘을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래. 할아버지보단 네가 낫지. ‘ 내가 신고 있던 크록스 한 짝을 딸에게 건네고 맨발로 바닥을 디뎠다. 햇볕에 달궈진 철에 발바닥이 데이는 느낌이었다. 신발을 찾지 않으면 걷기 힘들 것이다.
지나가는 분들이 맨발인 나를 보며 ‘신발이 떨어졌군요···’ 하며 지나갔다. 딸과 내 크록스 색깔이 같아서 내 신발이 떨어진 것으로 오해를 한 모양이다.
‘아. 아니요. 신발을 날려버린 건 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칠칠맞은 사람이 아닌데...’
원피스를 입고 등산한 사람의 변명이 얼마나 신뢰가 갈까 싶어 속으로만 억울해했다. 무사히 신발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딸은 이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걷느라 적어도 200 미터는 즐겁게 갔던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걸었는데 눈앞에 또 끝도 없는 계단이 펼쳐졌다. 계단을 반정도 오르니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너무 힘들어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계단이 너무 가팔라 저 위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언뜻 간판 같은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진짜 출구인가? 힘을 내서 계단을 두 칸 더 올랐다. 오! 진짜 출구가 적힌 간판이다. 그때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카페에서 시원한 식혜를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라고. 계단을 다 오르면 바로 앞에 카페가 있다고 했다. 더위에 지쳐 어질어질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힘을 냈다. 다음엔 꼭 입장료를 제값 내고 선선한 날에 오겠다. 재 방문 시엔 오롯이 경치만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곧 손에 잡힐 ‘형태가 있는 오아시스!’인 식혜를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