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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 Oct 30. 2024

여행만 가면 다친다?

의문의 머피의 법칙

  발리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있을 때였다. 다리에 통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은 한국 남성분이 일행과 함께 수영장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통깁스라 다리에 땀이 많이 차고 가렵겠다 (통깁스 유경험자 다운)라는 생각을 잠깐했다. 목발을 하고 휴양지에 올 만큼 이 여행이 간절했던 걸까?라는 생각도 잠깐, 혹은 출발 며칠 전에 다쳐 지불해야 할 취소 차지가 아까웠나? 풍경이라도 보기 위해 여행을 강행한 걸까? 라는 생각 잠깐.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 그는 낯설고 의아했지만 금세 기억에서 잊혔다.


  그런 그가 단번에 떠올랐다. 그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경우의 수. ‘여행지에서 다쳐 깁스를 한 것일 수도 있.었.겠.다’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그의 처지에 내 상황(베트남 휴양지에서 자전거 타다 넘어져 왼쪽 다리가 퉁퉁 부은 상황) 이 오버랩되며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에게 무한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베트남 독립기념일이 지난 후 병원에 간다면(다친 날이 하필 독립기념일로 모든 병원이 휴무였다.) 나도 그와 같은 모습으로 휴양지를 누비게 될까?


  부기를 빼기 위해 다리를 높이 들고 하릴없이 소파에 누워 있으려니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이상했다. 왜 여행만 오면 다치는 걸까? 머피의 법칙인가?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더 오래 기억에 남아 왜곡이 생긴 걸까? 아니다. 병원 진료 기록이라는 명명백백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평소보다 더 당황해 마음 졸인 건 맞을 것이다.



  1. 대학 친구들과 일주일간 제주도 자전거 하이킹을 할 때다. 마지막으로 한라산 등반만 남겨 놓았다. 등반에 필요한 먹거리를 사러 슈퍼에 갔다 왔는데, 숙소에 남아있던 동기가 구급차에 실려가고 있었다. 담석증이었다. 우리는 여행을 중단하고 그 친구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2. 회사에서 스리랑카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방을 같이 쓰던 동료가 심한 복통으로 현지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게 되었다. 입원 수속을 받는 반나절동안 병원에서 함께 있어준 기억이 있다. 귀국날까지 퇴원하지 못했던 그녀는 혼자 있어도 괜찮다며 내게 남은 일정을 계속하라고 독려했고, 못 이기는 척 그녀를 두고 병원을 나왔던 찜찜한 기억도 있다.  3. 중국에서 보름간 배낭 여행할 때다. 딱 하루, 다른 나라 여행객들과 함께 텐트에서 1박 하며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트레킹 프로그램을 신청했었다. 도시여행과 달리 말도 탈 수 있는 오지체험이라 기대감이 컸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부터 열이 올라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염치불고하고 먼저 도착해 있던 어느 외국인의 텐트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트레킹 일정은 전부 참여하지 못했다. 4. 싱글이었던 나는 눈치 없이 친구네 커플을 따라 스키장에 갔는데 눈치 없게도 가자마자 골절 사고를 당했다. 나를 태우고 병원에 가느라 그 커플의 여행을 망쳤었다. 5. 하와이에서 남편의 손가락 인대파열 사고 때 내 안의 이중인격이 등장해 남편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싶었던 일도 있다. 이런 기억들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그때 수영장에 갔던 아이들이 방으로 들이닥쳤다. 아이들은 워터 슬라이드가 얼마나 스릴 넘치는지, 몇 번이나 탔는지, 엄마도 같이 타면 좋았을 텐데 등등 서로 자기의 말을 하느라 소란스러웠다. 평소 누워 있는 엄마를 자주 봐왔더니 지금 누워 있는 엄마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 걱정 없이 조잘거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일은 엄마도 함께 수영하러 가자는 말을 남기고 씻기 위해 퇴장했다. 종일 한 일도 없는데 배는 고팠다. 다 함께 저녁으로 룸서비스를 시켜 먹은 후 더 나아진 내일을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진통제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욱신거리는 통증을 이기기 위해 호텔에서 준 파스 한통을 다 써가며 밤을 보냈다.  


(전 이야기와 이어지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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