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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Mar 26. 2024

혼자 있을 때면 발동되는 생명체

소란

"MBTI가 뭐예요?" 첫 만남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다. 상대방과 친해지기 위해서, 때로는 어색함을 풀기 위해서. 이 질문을 들을 때면,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검사할 때마다 두 가지의 결과가 나오기에, 고민 끝에 하나를 말한다. 두 가지의 결과 중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내향형을 뜻하는 I(Introvert)이다. 나를 잘 모르는 지인은 내가 I라고 하면 놀라곤 한다. 나는 첫 만남과 친해진 이후의 모습이 정반대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첫 만남에서의 나는 꽤 적극적인 자세로 말을 많이 한다. 실상은 어색한 상황을 견디지 못해 홀로 발악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나의 행동 탓에 처음 만난 상대방은 나를 외향형인 E일 것이라고 오해를 한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나의 일화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때는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내려야 하는 정거장에서부터 한 정거장이 남았을 쯤에, 머리 위의 빨간색 하차벨을 눌렀다. 성격이 급한 나는 빠른 하차를 위해 미리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에 서있었고, 버스 기사님께서 문을 열어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해서도 내 눈앞의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스 기사님이 하차벨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건지, 뒷문도 열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하셨는지 앞문만 열고 뒷문은 열지 않으셨다. 버스 안에서는 어림잡아 대여섯 사람이 앉아있었지만, 나는 버스 기사님에게 뒷문도 열어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내려야 할 정류장을 차창 너머로 아련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내가 내릴 곳은 여기가 아니었던 척 연기를 했다. 다행히도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 사람이 하차벨을 눌렀고, 가까스로 같이 내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보다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린 탓에 약속 시간에 늦은 나는, 왜 늦게 왔냐는 친구의 말에 정거장 하나를 실수로 지나쳤다는 말을 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또 다른 일화는 어금니가 아파서 치과를 간 날이었다. 양치를 게을리했던 나는 충치라는 원치 않는 친구가 생기는 바람에 신경 치료를 받아야 했다. 치과 의자에서 멍을 때리고 있으면 치과 의사 선생님이 등장하면서 나의 시선은 서서히 충치 사진이 띄워진 컴퓨터 화면을 지나 하얀 천장으로 옮겨 간다. 얼굴에 초록색 천이 덮이기 전에 치과 의사 선생님이 "치료를 받다가 아프면 왼손을 드세요."라고 말을 한다.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로 답을 대신하며 얼굴 위로 초록색 천이 뒤덮인다. 그렇게 나에겐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난 뒤, 초록색 천이 들리고 사위가 점차 밝아진다. 말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분명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거 같은데, 눈부심에 눈을 힘껏 찡그리고 있다가 의사 선생님의 표정을 바라봤다. 거울을 건네주며 나를 쳐다보는 의사 선생님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거울 속에는 미처 마르지 못한 하얀 눈물 자국과 하도 세게 깨물어서 하얘진 입술을 한 내가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길래 잘 참는 줄 알았는데, 아프면 손을 들지 그랬어요."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음에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나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머쓱하게 웃기만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낯선 사람이 있는 공간이라면 아프면 아프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이런 모습을 마주한 하루면 자기 전 누워 허공으로 발차기를 시전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때 이렇게 할걸.'라고 후회를 하면서. 문장을 과거형으로 끝내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성격은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인간은 진화하는 동물이기에 다년간의 축적된 경험으로 내공이 쌓일 법도 한데, 여전히 낯선 사람들 사이에 혼자 있을 때면 소심이 모드가 켜진다. 예전에는 소심이 모드가 켜진 내가 답답하고 미웠는데, 이제는 이런 모습 또한 나의 일부이기에 마냥 미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소심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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