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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Jun 12. 2024

이삿짐 정리에 관하여

빵호

원룸에서 투룸으로 5년을 살고 곧 아파트로 이사간다. 물건을 좋아하는 나는 그동안 증가하는 평수만큼 빈 공간을 차곡차곡 물건으로 채워왔다. 인테리어용품, 의류, 인형, 책 같은 부류들이다. 인간은 상황의 변화에 순응하며 진화해온 동물임을 다시금 느낀다. 넉넉하면 채우고 작으면 줄이는 것이다.

오 년 내내 쌓인 것들은 더 이상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양이었으니 이사라는 경사에 맞춰 대대적인 짐정리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이제 예전만큼 많이 사지 않는 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물욕이 사라졌다고 느끼고 있던 차에, 정리는 매우 손쉬운 일이 되리라 생각했다. 아! 드디어 무소유를 지향하는 것인가!

정리가 끝난 후 시원하고 광활한 집 안 풍경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어쩐지 이삿날이 다가올수록 정리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그 이유는 “버릴 수 없음”이다. 물건들을 찬찬히 솎아내보니, 이내 이들을 버릴 수 없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첫째는 언젠가 쓸 수 있을 것이라며 일단 많이 구매하고 보는 만년대비형 인간의 눈에는 쓸모가 아직도 많아보이기 때문이다. 물건을 버리려다 ‘이걸 활용할 상황이 오지 않을까? 언젠가, 언젠간!’ 이런 생각을 하며 들었던 손을 못내 놓고야 만다.

그리고 둘째는 물건마다 묵혀둔 사연이 있다. 나는 여기에 붙은 때묻고 낡은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분명 이삿짐센터 기사님들의 곡소리를 부르게 될 것이다. 기사님들이 허리를 짚고 아이고! 아이고! 하며 많은 짐을 옮기는 모습이 상상되고 그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이사 비용에 내 지갑이 비명을 지르는 환청이 매일 밤마다 들렸다. 그럼에도 쉬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소소하게 스트레스를 받던 나날이었다.

이사를 도우러 우리 집에 온 엄마는 무자비하게 많은 짐을 보고 눈을 희번뜩 빛냈다. 그녀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대신 정리를 시작했다. 효용성을 중시하는 엄마의 전두지휘 아래에서 많은 물건이 버려졌다. 엄마는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언을 했지만 사실 말이 조언이지 실상은 치열한 논쟁이었다.

엄마는 내가 이 옷을 일년에 몇 번 입었는지, 이 물건을 얼마나 자주 사용했는지 또는 이 물건이 단순한 추억적 물건인지를 모두 궤뚫어보았다. 자주 입지 않거나 사용하지 않는 것들은 그녀의 냉철한 판단 하에 정리당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이 물건이 나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고 얼마나 이용가치가 있는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나 나 또한 엄마가 낳고 기른 딸이다. 엄마의 성격과 가치관을 일부 물려받은 딸은 곧 자신의 생각을 반추했다. 그렇게 물건을 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사연이 깊은 물건의 정리는 과거에 매여 살아가는 내게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어린 시절부터 물건에 성격과 자아를 부여하고, 살아있는 것으로 대우하여 감정을 이입하면서 자라왔던 나는 더더욱 버리지 못하겠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숱한 고민에 눈을 감고 모른 척을 하며 미루고 미뤄웠으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날이 왔다. 이사 전날이었다.

으레 그러하듯 이사 전날은 집안에 아기공룡 둘리가 헤집고 간 듯한 난장판으로 어지럽다. 나는 차라리 '짐 정리'라는 미션 마감이 코앞에 닥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새 집을 계약하고 은행 대출을 받고 전 집의 계약을 마무리하며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던 나는 극심한 피로감에 지쳐 모든 감성의 문을 닫았다. 오직 정리라는 목표 하나만을 향해 ‘앞으로 쓸 것인가? 지난 2년동안 사용한 적 있는가’라는 기준 아래에서 하나하나 해치웠다. 그러다가 매우 익숙한 상자를 목격하고야 만다. 옷장 행거 밑에 깊숙이 숨겨져있는 낡은 상자였다.

그 속에는 내 어린시절이 몽땅 들어있었다. 인형과 편지, 액자, 책, 다이어리 등이었다. 세상에! 잊고 있었던 여러 날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서울로 혼자 상경할 때도 버리지 못해서 가지고 올라왔던 물건들이었다. 바삐 흘러가는 세월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초등학교 바자회에서 엄마를 졸라서 천원 주고 산 작은 불독 인형이 있었다. 집에 인형이 많았던 나는 여기서 엄마에게 인형을 더 사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바자회 시간이 끝나가는 무렵 한 귀여운 불독 인형이 내 마음속으로 꽂혀버렸다. 엄마에게 엄청나게 떼를 쓰고 울며 기어이 쟁취했던 그런 인형이 여기 있었다. 인형에게서 바자회에서 팔았던 번데기와 떡볶이 기름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마법소녀물 애니메이션과 순정만화를 보고 영감을 받은 내가 만화를 그려 친구들과 돌려보았던 그림책도 있었다. 그 당시 그림책 한 페이지를 비워서 친구들에게 감상평을 꼭 남기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하여 최초의 방구석 댓글 문화를 시도한 기억이 있다. 어린이여서 할 수 있는 유치하고 기발한 발상에 낄낄낄 웃으며 만화책을 다시 읽었다.

상자 가운데에 친구와 싸우고 화해를 청하는 편지와, 학기를 시작하고 친하게 지내보자는 어색한 편지가 있었으며, 친구와 교환했던 일기와 우정의 증표로 나누어가진 팔찌와 반지, 선물로 받은 인형과 티셔츠가 구석에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 만났던 남자가 선물한 캐리커쳐 액자와 신발도 여기에 고스란히 있었다.

수많은 추억들의 범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빛바랜 기억에도 오감이 살아있다. 그날의 소란스러운 시내의 분위기와 집 밖을 나서면 보이는 저물어가는 노을의 풍경, 싱그러운 풀냄새, 놀이터의 까슬까슬한 모래의 질감, 여름 햇볕에 달구어진 정글짐과 그네 안장, 교복의 꼬질하고 눅눅한 땀냄새, 뜨거운 더위로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교실 창가와 시원하지 않은 선풍기 바람, 그리고 말랑하고 촉촉한 친구의 손바닥과 포근한 엄마의 살내음..

오래된 모든 감각이 연동되어 나를 강타한다. 편지와 책에 적혀있는 어린 글씨체가 눈에 박힌다. 그때의 나는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미숙하고 비뚤비뚤한 글씨체였다. 어린 나는 지금과 달리 유약하고 욕심이 많지만 용감하고 당찬 아이였다. 딱 어린이다운 성정을 갖고 있었다. 문득 내가 잃어버린 그 모습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그 용감한 시기를 함께한 이들을 추억하면서, 그때 인연이 다하지 않았더라면 만났을 불가능한 미래를 상상해보는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도 모르게 차곡차곡 쌓아올린 미련이 무너져내렸다. 그 미련 때문에 이 물건을 버리지 못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미련이 나를 지탱해왔음을 자각한다. 일순간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옛 편지와 의류, 책, 악세서리, 인형따위를 하루 내내 아쉬워하며 수십번 들여다본 후에 최종의 인사를 고했다.

안녕, 안녕! 네 덕분에 내 유년기가 반짝 반짝 빛났어.

그리고 물건을 통해서 상기한 추억 속의 사람들에게도 열린 작별을 고했다. 어디선가 또 만나 추억을 다시 쌓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또한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에게는 무한한 행복 속에 지내기를 기원했다.

묵혀두었던 물건을 정리하는 것은 쾌쾌묵은 사람의 마음도 정리하는 일임을, 과거를 깨끗이 쓸고 닦고 잘 이별하는 일임을 몸소 느낀다. 잘 쌓아온 추억은 정리할 때도 먼지 한 톨 없다. 슬픈 추억이었든, 행복한 추억이었든, 아쉬운 기억이든 갈무리된 감정은 현재의 나에게 미소를 띄게 할 뿐이다. 마음 속에 훈풍이 불게 한다.

우리의 매개체였던 물건을 떠나보내도 추억은 어떤 형태로든 내 몸에 각인되었다. 우리가 나누었던 감정과 말과 글귀는 내 혈관과 피부, 정신에 스며들었다. 이제 나는 친구가 자주 사용하던 말을 쓰고 사랑한 사람의 행동습관을 그대로 따라하며, 선생님과 선배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옳다고 인정하며 내 가치관으로 받아들였다. 나를 스쳐갔던 사람들과의 교류는 현재의 나를 완성해주었다.

​​

이사하는 날, 우리 집에 온 이삿짐센터 기사님이 놀라며 말했다. 그는 일전에 박스 여러개를 주려 집에 한번 방문했었다.

“짐이 그사이에 엄청 많이 정리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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