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귤
"네? 제가 쿨톤이라고요?“
재미 삼아 받으러 간 퍼스널 컬러에서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들었다. 정확하게는 여름 뮤트 덜 톤을 판정받았다. 내가 알고 있는 퍼스널 컬러에 관한 통상적인 상식은 피부가 하얗거나 붉은 사람은 쿨톤이며, 피부가 노랗거나 까만 사람은 웜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노랗고 까만 내가 쿨톤이라니. 마치 내 정체성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한평생 웜톤으로 살아왔던 나의 세상은 그렇게 무너졌다.
대부분의 사람은 핑크빛이 도는 블러셔를 볼에 바르지만, 나는 유독 선명한 주황색 블러셔를 좋아했다. 흔치 않은 그 색은 어느새 나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하필 월요일이라 그랬을까. 그날따라 안색이 좋지 않은 탓이었을까. 평소와 다름없이 블러셔를 바르다 문득 촌스러워보였다. 주황색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찝찝한 의문을 풀지 못했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일찍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며 기다리다 보니 먼발치에서 홍이 걸어오고 있었다. 손을 흔들며 홍과 반갑게 인사를 하다 일순간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원래도 어여쁜 아이였지만, 분명 그날은 달랐다. 마치 연예인이 눈 앞에 있는 것 같았다. 홍은 최근에 쿨톤으로 진단을 받고, 화장법과 옷 스타일을 바꿨다고 말해주었다.
홍을 다시 바라보았다. 경이로운 퍼스널 컬러의 효과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 그럼에도 선뜻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으러 갈 수가 없었으니, 가격이 너무 비싼 탓이었다. 홍이 받은 곳은 15만 원으로 내 마지노선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조금 더 가성비 좋은 곳을 찾자니 업체가 너무 많아 이내 포기했다.
요즘 세상은 알고리즘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퍼스널 컬러를 검색한 그날 이후부터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는 온통 퍼스널 컬러 관련 게시물로 도배되었다. 그중 한 광고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2인 가격으로 단 79,000원만 내면 퍼스널 컬러를 진단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홍의 변화에 함께 감탄을 금치 못했던 영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곧바로 예약했다.
대망의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는 날이 되었다. 미리 안내받은 주의 사항대로 화장기 없는 상태로 방문하였다. 영은 햇볕에 타면 빨개지는 성질의 하얀 피부를 소유했기에 당연히 쿨톤일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영은 웜톤 진단을 받았다. 그 충격도 잠시, 내 차례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도 어쩌면 쿨톤일지도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상태로 상체에는 하얀 천을 두르고, 머리에는 하얀 두건을 쓰니 태초의 모습이 되었다. 일순간 초라해졌다. 아무리 직업이라지만 낯선 이에게 이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거울을 보며 샐쭉한 표정으로 있다가 친구들과 눈이 마주쳤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어깨와 콧구멍이 들썩거렸다. 수많은 색의 향연이 시작되자 웃음기는 점차 사라졌다. 색상 천들이 얼굴을 거쳐 갈 때마다 나는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와 날밤을 꼬박 새운 사람이 되었다가, 혈색이 도는 깔끔한 사람이 되었다가, 입가 주변이 거뭇거뭇해졌다가, 환해졌다. 그렇게 나는 쿨톤을 진단받았다.
이제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밝혀야 한다. 친구들에게 사실 나는 웜톤이 아니라 쿨톤이었음을 말하자마자 거센 반응이 돌아왔다.
"엥? 무슨 소리야!"
"에이, 네가 쿨톤일 리가 없어.“
생각보다 거센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정말로 내가 쿨톤인지 확인해야 한다. 우선 화장품을 교체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마침 부처님이 와주신 덕분에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각종 후기를 정독하며 하루 만에 블러셔 1개, 립 4개를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분홍빛 가득한 화장품은 어쩐지 생소하다. 열심히 화장을 해보지만 거울 앞에는 홍두깨 부인이 계속해서 떠나질 않는다. 홍두깨 부인이 되기 싫다. 난 혁이 부인인데. 불신에 사로잡혀 기어이 퍼스널 컬러를 한 번 더 예약하고 말았다. 그 금액은 무려 129,000원이었다.
두 번째로 받은 퍼스널 컬러 진단 결과는 가을 뮤트로 나왔다. 본래 내가 선호하던 웜톤으로 나왔지만 썩 시원하지가 않았다. 왜 결과가 다른 것인가? 결국 퍼스널 컬러를 셀프로 진단할 수 있는 앱을 다운 받기에 이르렀는데, 거기서도 여름 뮤트와 가을 뮤트가 나왔다. 어느 하나 명확하지 않은 결과 앞에서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퍼스컬 컬러 진단을 받아야 정확한 나의 피부색을 알 수 있지 않겠냐며 열을 올리는 내게 혁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우리 여부... 벌써 퍼스널 컬러에 25만 6천 원을...”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황급히 등을 돌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는 친절하게 다가와 퍼스널 컬러 진단비와 화장품 가격 따위를 나열했다. 말이 없어진다. 인정할 수 없다는 콧바람과 슬프지만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콧바람이 고요히 불고 있다. 서로의 콧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나는 결국 그의 시선을 오롯이 마주하고는 참담하게 고개를 떨궜다. 처음부터 홍이 받은 곳으로 갔다면 이렇게 25만 원까지 지출할 일은 없었을 텐데, 기어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나의 퍼스널 컬러 집착기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