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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Jul 23. 2024

정신차려 지지배야

소란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술자리는 좋아한다. 술에게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듯하다. 인상이 차가운 사람도 성격이 무뚝뚝한 사람도 술 앞에서는 무장 해제되니까. 고작 알코올이 들어간 액체일 뿐인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이토록 쉽게 흐트려지게 만들다니. 술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모습, 그 속에서 오가는 진솔한 이야기, 웃을 거리가 많은 분위기가 좋아서. 그래서 술자리가 좋다. 하지만 뭐든지 적당히란 말이 있는 법. 적당한 술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좋은 인상을 남기지만 과한 술은 흑역사를 남긴다.


대학교 신입생 때는 선배들이 주는 술을 거절하기 어렵기에 주는 족족 다 받아마셨다. 주량도 술버릇도 모르면서 참 무모하게도 마셨다. 취해서 눈이 풀렸는데도 선배들의 잘 마신다는 칭찬 한 마디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취해 더 마시곤 했다. 나는 술을 마실수록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시선과 말이 돌아왔다. 잔을 거듭 비울수록 나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점점 빨개졌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나는 괜찮다며, 더 마실 수 있다고 객기를 부리곤 했다. 그렇게 나는 주량이 조금씩 늘어났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거늘. 어김없이 사건은 일어났다.


가족 행사로 친척들이 다 모이던 날이었다. 그간 만나지 못한 날 만큼 못다 한 이야기를 하느라 테이블마다 시끌벅적했다. 나는 형부와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애주가인 형부는 어김없이 소주를 주문하였고, 하나둘 친척들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나의 차례가 되었을 때, 형부는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술을 권해왔다.


"이제 술 한잔해야지?"

"그럼요. 한 잔 주십쇼."


잦은 술자리 덕에 주량이 늘었다고 생각한 나는 흔쾌히 술을 받았다. 다가올 미래는 모른 채. 이런 나의 행동에 형부는 잇몸이 만개하였다. 불과 작년까지는 청소년이었던 내가 이제는 성인이 되어 술을 마신다는 사실이 즐거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나와 형부는 몇 잔의 술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주둥아리를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되었다. 형부의 술 마시는 속도는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결국 페이스를 놓쳐 잔뜩 취한 나는 꼬장을 부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그만 마시라는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술을 더 달라고 진상을 부린다든가, 곧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조카에게 너도 마시라며 술을 건넨 것이다.


"갠차나. 여기 다 으른들이야. 으른들이랑 있을 땐 마셔도 돼."

"싫어."


속으로 매정한 자식이라고 투덜거리면서 술을 권유하기를 그만뒀다. 이제는 눈꺼풀이 무겁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눈이 감긴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눈을 뜨니 어느새 내가 밖에서 걷고 있다. 사실은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끌러 가고 있다. 또 눈이 감긴다. 다시 눈을 뜨니 이번에는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눈 뜰 때마다 순간 이동을 하는 기분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밖에서는 소란한 소리가 들린다. 속이 메스꺼워서 눈을 뜬 나는 침대에 앉아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진정시켜본다. 하지만 나의 위는 한계치에 도달했는지 침대 바닥에 속을 게워냈다.


"우웩"


의문의 소리에 정자씨가 방의 불을 켜며 들어왔다. 실눈으로 경악한 정자씨의 표정을 보았지만 눈꺼풀이 무거웠던 나는 그대로 다시 눈을 감고 누웠다. 그렇게 몰려오는 수마에 빨려 들어갈 때쯤, 매서운 손길이 나를 깨웠다. 강제로 몸이 일으켜지고 거실로 쫓겨났다. 거실에는 식당에서 본 친척들이 있었다. 헤어짐이 아쉬웠는지 우리 집으로 2차를 온 것이다.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거실로 가자마자 바닥에 누웠다.

또 매서운 손길이 느껴진다. 몸이 반강제로 일으켜졌다. 방으로 돌아가라는 신호인가 싶어 눈을 떴더니 또 울렁거림이 찾아왔다. 이제는 내 몸의 통제력을 상실한 나는 참으려는 노력도 없이 또 게워냈다. 속을 시원하게 비우고 나니 아까보다 더 매운 손길이 돌아왔다. 정자씨의 샤우팅도 함께.


"정신 차려, 지지배야"


눈을 감고 있어도 시야가 밝은 게 느껴진다. 아침이 온 것이다. 눈을 뜨니 몸의 감각이 서서히 깨어났다. 타는 듯한 목과 지끈거리는 머리, 얼얼한 뺨이 느껴졌다. 그리고 간밤의 일이 인화한 필름 테이프처럼 점점 선명해진다. 떠오르는 기억에 이대로 영영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방을 나서면 마주할 미래가 두려웠다. 무엇보다 정자씨의 후환이 제일 두려웠다. 두려움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는 술 앞에서 까불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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