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호
“하아-. 어쩌자고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지금 체스키크룸로프 시내에서 동떨어진 숙소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 불과 사흘 전까지 난 한국에 있었다.
치열했던 취업 시장을 통과한 나는 발령을 앞두고 본가 거실에서 드러누워있었다.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밭에서는 이제 막 더워지기 시작하는 5월의 햇살로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나는 어느 선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취업하면 50대가 될 때까지는 긴 휴가 내기 어려울거야. 그 전에 여행가야 해!”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뿐이다. 꿈에 그리던 장거리 여행을 떠나야한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지인 중 나와 시간이 맞는 사람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혼자 가거나 여행을 취소해야 했다. 그 순간 나는 이게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가족의 안락한 품에서 떠나 자립할 수 있는 기회임을!
살아오는 내내 청각장애인으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외로움을 느꼈다. 어긋난 소통에서 비롯한 오해와 사회에서의 장애에 대한 편견은 나를 지치게 했다. 가족은 아팠던 어린 나, 장애인인 나의 모습에만 집중하며 걱정하고 그들의 품안에 두려고 했다. 홀로 낯선 땅을 여행하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지만 바로 지금 이 모든 시선에서 떠나 오롯이 나로서 있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나라를 알아보고 항공권을 그 자리에서 결제했다. 그리고 먼 곳으로 떠나는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눈빛을 뒤로 하고 이 곳 체코로 왔다.
지난 2일 동안 홀로 여행의 참맛을 누렸다. 혼자라는 것은 생각보다 좋았다. 내 마음대로 여기저기 다니며 쉬고 싶을 때 쉬고 보고 싶은 것은 자유롭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다 체스키크룸로프에서 처음으로 이 생각이 깨졌다. 숙소를 생각보다 멀고 외진 곳에 잡은 것이다!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집들이 듬성듬성 줄어드는 길에 덜커덕 공포를 느꼈다. 급기야 나는 바닥에 끌던 캐리어를 들고 뛰어서 숙소를 겨우 찾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허름한 숙소였다. 어느 정도냐면 내가 있던 방의 잠금장치가 고장난 것이다. 이 야심한 시각에 다른 곳으로 가기에도 늦었고 아무도 없는 안내데스크에 컴플레인을 걸기도 무서웠던 나는 캐리어를 문 앞에 막아두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혼자라는 것이 무섭고 서럽고 후회됐다.
다음 날 나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야했다. 그런데 아뿔싸, 미리 출력해온 기차 예약확인증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캐리어를 몇번이고 뒤져보고 나서야 패닉이 온 나는 몇 분째 오도카니 서있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고 무작정 안내데스크로 달려가 인터넷을 쓸 수 있는지를 요청했다. 서투른 영어가 써진 핸드폰 메모장과 허둥대는 제스처를 본 직원은 심각성을 깨달은 듯 숙소의 주인장을 불렀다. 곧이어 나온 주인장은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여서 속으로 떨었지만 그는 바로 컴퓨터가 있는 어느 방으로 인도했다. 나는 즉시 컴퓨터에 달려들었으나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인터넷 홈페이지가 모두 체코어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읽을 줄만 알고 컴맹이었던 주인장은 보다 못해 직원들을 불렀고 이윽고 한 무리가 형성되어 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려 애를 썼다. 그들은 내 목표역을 물어보고는 해당하는 기차표를 이리저리 찾았다. 프린터 연결도 안 되어있었던 바람에 프린터도 연결하고 겨우 원하는 종이를 출력하는 데에 성공했다. 프린터에서 예약확인증이 출력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짧은 환호성을 내지르고 서로를 껴안았다. 마치 올림픽에서 자국의 선수가 메달을 쟁취한 순간처럼, 축구경기장에서 응원하던 선수가 골을 넣은 것처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모두에게 땡큐! 땡큐 베리 머취!를 외쳤다. 기쁨과 축하가 뒤엉킨 아침이었다.
체크아웃할 때 숙소 주인장은 나를 안으며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하루 더 자고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가야한다며 웃었다. 내 안에서 그는 험상궂은 아저씨에서 농담을 좋아하는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로 변모해있었다. 숙소의 모든 사람들은 떠나가는 내게 손인사를 하며 행운을 빌어주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기차역에서 나는 역무원에게 예약확인증을 보여주며 바로 탈 수 있는 기차표가 맞는지, 더 진행할 절차가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맞다며 그대로 탑승하라고 했다. 그래서 기차를 탔다. 그러나 검표하러 온 직원이 이 종이를 거절했다. 내가 청각장애인이므로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달라고 번역기에 적어 말했음에도 그는 계속 고함을 질렀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남성이 도움이 필요하냐며 묻고는 일어나서 도와주었다. 그는 이 종이가 잘못된 것이며 수수료를 내고 표를 다시 끊어야한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상황이 간신히 파악된 나는 다시 결제했다. 사전에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기차역에서 확인받은 만큼 확실한 표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는 어디서 오류가 있었던 것인지를 끝내 알 수 없었지만, 하차할 때 앞자리에 앉았던 남성을 찾아서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건넸다. 당신의 도움을 기억하겠노라고. 번역기를 본 그는 활짝 웃었다.
빈 중앙역에 도착한 나는 하루사이에 생긴 여러가지 일로 피곤했고, 배가 몹시 고팠다. 그 때 내 눈에 젤라또 아이스크림 매대가 보였다. 맛있어보이는 아이스크림 그림이었으나 단 한 금액만 표시되어있었다. 저 금액이 뭘까? 한 스쿱 가격인가, 두 스쿱 가격인가? 두 스쿱으로 먹고 싶은데 그림만 보면 맞는 것 같아.
사실 나는 그동안 최소한으로만 식사하거나 마트에서 사먹었다. 이국적인 풍경의 새로움에 취해 발에 물집이 날 정도로 열심히 보러 다닌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혼자서 주문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던 탓이다. 외국어도 할 줄 모르며 들리지도 않는 내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일이 벌어졌는데 상황파악도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내게 큰 공포였다. 그런 나에게 외국 길거리의 메뉴판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매대에서 주문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길거리음식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나였음에도.
하지만 나는 일찍이 기차에서 그 공포를 경험함으로써 되려 앞으로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런 일도 겪었는데 이런 일쯤은 뭐 어때?란 이상한 용기를 가지고 젤라또를 주문했다. 표시된 금액의 돈을 주며 두 스쿱을 주문하니 주인은 손가락 하나를 들며 한 스쿱을 담아주었다. 두 스쿱이 아니었구나. 아쉬웠지만 근처 벤치에 앉아 마저 먹었다. 이윽고 다른 사람이 매대에 가더니 똑같은 돈을 주었는데 두 스쿱의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으나 명백히 똑같은 돈이었다. 나를 깔보는 듯 요상했던 주인의 표정이 뇌리에 스쳐지나가면서 내가 저 주인에게 차별을 받았음을 알게 된 그 순간, 나는 깔깔 웃고 말았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인정하겠다. 나는 줄곧 혼자 서고 싶었으나 막상 혼자가 되니 두려웠다. 사회에서 청각장애인의 능력에 대해 제한을 두는 인식에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나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국의 낯선 땅에서 그 한계를 맛보았다. ‘홀로서기’에 대한 무력감과 후회를 느낀 순간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줄기 빛은 항상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선의와 도움을 받았다. 바다를 건너 머나먼 외국에서 홀로 날아온 여행자에게 보여준 그 호의와 따뜻한 마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내 발로 찾아간 여정 속에 있었다. 내가 혼자 떠나올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혼자 무언가를 해볼 용기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손에 흘러내리는 이 젤라또는 내 용기의 증거였다. 몇 유로의 손해 쯤은 이미 상관없었다. 불과 몇일 전까지 주문할 자신이 없어 다양한 음식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나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다른 나라로 넘어와 이 거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비로소 ‘혼자서’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롯한 나 자신의 무게를 체감할 수 있었다. 내 일생을 덮어왔던 홀로서기에 대한 두려움을 마침내 극복했다.
한바탕 시원하게 웃어넘긴 나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따사로운 햇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오후 오스트리아 빈의 햇빛은 적당히 덥고 바람은 적당히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