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귤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세부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단순한 일정표를 만들고, 모든 식당과 교통수단, 마사지도 미리 예약했다. 원래 숙소랑 비행기만 예약하고 여행을 떠나는 편이지만, 이번 여행은 달라야 했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만큼 모든 동선을 고려하여 만전을 기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생리 예정일은 다음 주라고 떴지만, 혹시 몰라 탐폰을 미리 구매하였다. 설마 진짜 생리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생리대는 챙기지 않았다. 자궁은 이런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기어이 인천공항 화장실에서 피를 보게 했다. 탐폰은 이미 위탁 수하물로 보내버려 사용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공항에 있는 약국에서 생리대를 샀다. 약국에서 사는 생리대는 얼마나 비싼지 아는가? 더군다나 공항 약국의 물가는 참으로 비쌌다.
첫날 일정은 새벽에 도착하는 항공편에 맞춰 고래상어와 정어리 떼, 거북이를 볼 수 있는 투어를 예약했다. 부모님 체력이 따라줄지 걱정됐지만, 과감하게 강행하기로 했다. 세부행 비행기를 타려는데 30분 정도 지연되었다는 안내를 받았다. 수학여행을 인솔하는 선생님처럼 급히 동선을 계산해보다 깊은 한숨만이 나왔다.
세부 공항에 도착하면 1시간 안으로 입국 수속을 밟고, 캐리어를 찾아야 하며, 수영복으로 환복해서 투어 팀에 합류해야 한다. 30분이 지연됐다는 것은 결국 이 모든 걸 30분 안에 해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안절부절못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빠는 주먹쥔 손에서 새끼손가락만 피고는 턱에 세 번 갖다댔다. 수어로 “괜찮다”라는 뜻이다. 아빠는 괜찮다고 다독여주며, 투어팀도 우리 비행기가 지연된 걸 알테니 기다려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럼에도 내 속은 점점 타들어 갔다.
세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캐리어를 열었다. 새로운 땅을 밟은 기쁨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이제 수영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무언가를 찾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어라? 수영복이 어디로 갔지?’ 처음부터 기억을 다시 더듬었다. 우리는 인천 공항 D 구역에 주차를 했고, 자동차 트렁크에서 우리 캐리어와 부모님 짐을 모두 챙겼다. 그런데 보조 가방은?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수영복과 오리발과 아쿠아 슈즈가 들어있는 보조 가방은 결국 그 트렁크에서 나오지 못했다. 곧바로 태혁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여보. 우리 보조 가방 차에 두고 왔어. 어떡해?”
그때 면세점에서 산 일명 ‘사랑 수영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 수영복은 태혁이 이번 결혼기념일 선물로 사준 것이다. 태혁은 ‘사랑 수영복’을 사준 연유로 내게 친구들끼리 맞춘 ‘우정 수영복’은 있지만 ‘사랑 수영복’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는 점을 들었다. 특별한 선물이다 보니 첫 개시는 리조트 수영장에서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지. ‘사랑 수영복’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미 한바탕 달리기를 하고 오기라도 한 듯 온몸에는 땀이 가득했다. ‘사랑 수영복’에 다리 한쪽을 넣는 순간 다시 한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싸늘하다. 다리 두 쪽이 다 들어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것을 입어야만 한다. 조심스레 다른 다리를 넣고 수영복을 올려보나 실밥이 뜯어지는 느낌에 결국 끝까지 입기를 그만뒀다. 괜한 객기를 부리지 말고 M 사이즈로 할 걸 그랬다. 튼실한 내 허벅지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축 늘어진 수영복을 들고 마주한 화장실 밖은 온통 수영복 차림들로 가득했다. 이미 땀에 찌든 티셔츠와 츄리닝 바지가 한없이 초라해졌다. 비참한 기분으로 발을 동동거리다 불현듯 아빠 캐리어에 운동복 등을 넣은 것이 생각났다. 태혁과 나의 캐리어가 위탁 수화물 무게를 초과한 탓에 아빠 캐리어에 무게가 나갈 만한 짐을 옮겨 담았던 것이다.
희망을 찾은 태혁과 나는 재빨리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캐리어를 닫고 나가려는 순간, 얼굴에 아직 안경이 있는 것을 느꼈다. 다시 렌즈를 챙겨서 손을 깨끗하게 씻고 렌즈를 꼈다.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이제 나가자고 말하려는 순간 탐폰을 끼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다시 캐리어를 열어 탐폰을 꺼내고 정말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다녀왔다.
우리를 포함한 12명이 커다란 차에 탔다. 여행은 시작도 안했지만 몸과 마음이 벌써 지쳐버렸다. 목베개를 착용하고 창문에 기댔다. 눈을 감았지만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투어 일정을 복기하고, 트렁크에 두고 온 수영복을 그리워하며, 철저하지 못한 나를 탓하기도 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런데 고프로는 어디에 있었더라? 일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고프로의 행방을 다시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곳은 절망스럽게도 세부 공항이었다. 결국 고프로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무룩한 내 모습을 본 태혁은 새끼손가락을 턱에 갖다대며 괜찮다고 위로해주었다.
마치 크게 넘어진 듯했다. 앉았다가 일어날 때 바지의 흙을 털어내는 것처럼 훌훌 떨쳐버리고 싶었지만, 온몸에 먼지와 흙이 덕지덕지 묻어 깊은 한숨만이 나왔다. 어디서부터 털어내야 할지 몰랐다. 속상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니 시선 끝에 엄마가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서 나를 발견했다. 처음 떠난 유럽 여행에서 한껏 상기된 나의 표정. 엄마는 그때의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엄마를 찬찬히 살펴봤다. 영영 젊을 줄만 알았던 엄마는 어느새 주름과 흰머리가 생겼다. 엄마에게 새벽부터 시작하는 투어가 피곤하지 않냐고 물어봤다. 엄마는 밝은 표정으로 주먹쥔 손에서 새끼손가락을 피고는 턱에 세 번 갖다댔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바다에서 다시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영에 흥미가 없다며 배에서 내리지 않겠다는 엄마는 어느새 발차기를 열심히 하며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고래상어는 유튜브로 봐도 충분하다던 아빠는 고래상어가 너무 크고 멋지다며 한참을 바라보고 계셨다. 어머님은 수영복을 두고 온 것이 아쉽지만 지금 입은 운동복도 귀엽다며 칭찬해 주셨다. 아버님은 바다 수영이 이렇게 즐거운지 몰랐다고 말씀해 주셨다. 모두 얼굴에 한가득 웃음이 가득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한국에 두고 온 오리발과 수영복, 그리고 잃어버린 고프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허벅지에 걸렸던 사랑 수영복은 태혁이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입혀준 덕분에 리조트 수영장에서 개시하는 데 성공했고, 잃어버린 고프로는 어느 친절한 천사 덕분에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여행이 끝나고 되돌아보니 결과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새끼손가락을 턱에 갖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