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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Nov 14. 2024

매운맛 순례

귤귤

“네 신랑 말이야. 밤에 힘 좀 써잉?”

“아잇! 할머니! 손녀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94년생 태영은 당황스럽다. 43년생 순례는 손녀사위가 남자구실을 잘하는지 궁금했다. 순례는 태영에게 조언했다. 만약 딸을 낳고 싶으면 여자가 즐거워야 한다고. 순례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다. 대용, 길용, 진용, 찬용, 석용. 순례는 즐겁지 못했다.


순례는 18살에 재건을 만나 충북 제천으로 시집을 왔다. 둘째 길용이 고열로 농인이 된 이후, 길용의 교육을 위해 다 같이 서울로 이사했다. 순례와 재건은 좁은 집에서 5명의 아들을 키웠다. 대용, 진용, 찬용, 석용은 모두 대학에 보냈지만, 길용은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순례가 재건과 이야기를 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는 대학에 가는 것보다 기술을 배우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길용은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뜻에 따라 바로 공사판에 뛰어들었다. 길용은 일과 병행하여 틈틈이 공부한 끝에 13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 후 토끼처럼 볼이 통통하니 귀여운 현미와 결혼했다.

순례는 자격증을 연달아 취득하고 결혼까지 한 길용을 보며 놀랐다. 이렇게 잘할 줄 알았으면 아들 뜻대로 하게 둘걸 후회가 되었다. 순례는 차가운 현실보다 오히려 자신이 길용에 대한 편견이 심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둘째 길용과 현미가 낳은 태영을 유독 아꼈다. 태영이 돌도 되기 전에 농인이 되었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아들에게 했던 과오를 다시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순례가 태영을 아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태영이 순례의 외모를 닮았다는 것이다. 태영을 데리고 나가면 순례의 동네 친구들이 딸인 줄 알았다며 한마디씩 한다. 순례는 딸이 없는 설움을 태영의 존재로 달랠 수 있었다. 순례는 네이버 검색창에 [조선시대 미인]이라고 치면 나오는 인물과 비슷하다. 쌍꺼풀이 없는 작은 눈과 둥글둥글한 코. 148cm의 작은 키에 넓은 골반까지. 태영은 순례의 외모와 골반을 물려받았지만 조선시대 미인까지 되지는 못했다. 자라면서 길용의 유전자가 뚫고 나오기도 했고, 쌍꺼풀 수술까지 했기 때문이다.


길용과 현미는 결혼하자마자 바로 부모님과 합가했다. 1층에는 순례와 그의 남편 재건이, 2층에는 길용과 현미, 그들이 낳은 태영과 해성이 함께 살았다. 삼대가 다세대 주택에서 산 덕분에 순례는 태영이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맞벌이하는 아들과 며느리 대신 태영의 밥을 챙겨주기도 했다. 순례는 종종 태영과 함께 김치만두를 빚었다. 그들은 환상의 듀오다. 순례가 반죽하여 만두피를 만들면, 태영은 빠른 속도로 만두소를 넣고 마무리한다. 만두를 쪄서 먹는 것도 좋아했지만 튀긴 것을 유독 좋아하는 태영을 위해 순례가 자주 튀겨주었다. 김장 시즌이 되면 그들은 역시 다시 한번 환상의 듀오가 된다. 함께 시장에 가서 필요한 재료를 사고, 온 가족이 모여 김장하기 전 소일거리들을 해치운다.


순례와 태영은 밤에도 같은 이불을 덮어 꼬옥 안고 잤다. 순례가 태영을 깨워 아침밥을 차리면 태영은 맛있게 먹고 초등학교로 등교했다. 태영은 학교에서 돌아와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저녁밥도 함께 먹고, 순례가 보는 쾌걸춘향을 함께 시청했다. 자막이 없어 드라마가 무슨 내용인지 몰랐지만 배우의 표정과 몰입하는 순례의 표정이 재미있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둘의 관계는 태영이 교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했다. 태영은 숙제가 많다는 이유로, 책을 읽고 싶다는 이유 등을 들어 위에서 자는 날이 늘어났다. 순례는 이제 태영에게 자신이 우선순위가 되지 않음을, 늘 함께 있을 수 없음을 알았다. 둥지 안에 있던 아기 새가 이제 자신의 품을 떠나고 있다. 그래도 태영은 하루에 한 번은 꼭 순례의 집에서 밥 한 끼를 먹었다.


어느새 직장인이 된 태영은 야근에, 회식에, 연애에, 약속으로 순례와 함께 하는 날이 더 줄어들게 되었다. 순례는 그가 보내고 있는 20대의 호시절이 궁금하면서도 그저 흐뭇하게 지켜봤다. 오랜만에 태영이 집에 있는 날이었다. 순례는 태영이 김치볶음밥을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다가 태영의 얼굴에 우환이 가득한 것을 알아챘다. 순례는 태영의 얼굴만 봐도 태영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다. 태영이 애써 밝은 척 회사 이야기, 요즘 화제가 되는 이야기 등을 연달아 이야기하지만, 순례의 눈에는 태영의 그늘이 짙게 보였다.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게야? 우리 손녀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두울까.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 걱정되네.” 태영은 순례가 깎아준 사과를 먹다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헉. 어떻게 아셨어요? 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행복하지 않은 게 맞나봐요. 할머니. 저….” 애인과 힘든 연애를 하고 있던 태영은 곧이어 눈물이 차오르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었다. 순례는 태영을 꼭 안아주며 무엇보다 태영의 마음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태영은 그 길로 애인과 헤어지고 6개월 정도 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이윽고 감자 도리처럼 동글하니 귀엽고 우직한 민혁을 데려오더니 사귄 지 9개월 만에 결혼했다. 순례는 태영의 급작스러운 결혼 선포에 적잖이 놀랐지만 태영의 선택을 믿었다. 10년 동안 친구였다고 하니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순례는 민혁을 보자마자 그의 볼과 뒤통수를 만지고 꼬옥 안아주며 말했다. “우리 손녀사위, 오늘 처음 봤지만은 딱 우리 식구 같어. 어쩜 그러지?” 순례는 민혁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나중에는 이런 말까지 했다. “나는 태영이보다 우리 손녀사위가 더 좋아. 껄껄껄. 태영아, 할머니가 이러는데 질투 안나? 으응?”


태영은 당장 이직할 수 없어 민혁과 당분간 주말 부부 생활을 하기로 했다. 순례는 주말이 될 때마다 태영을 대전으로 내려보내며 아기 새들이 밥은 잘 차려 먹을까, 살림은 잘할까, 시댁에 밉보이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을 했다. 머지않아 태영의 주말 부부 생활은 끝날 것이다. 순례의 마음은 좋았다가도 슬펐다. 하지만 태영이 더 이상 울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순례는 이제 다시 한번 태영을 보내주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태영에게 김장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태영은 평소처럼 퇴근 뒤에 순례의 집으로 갔다가 현관에서 큰 대야를 발견했다. 그는 이 대야가 창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 언제인지 안다.


태영이 성난 숨과 함께 현관문을 발칵 열었다. “할머니! 왜 말도 안 하고 김장해요! 뭐야. 배추는 또 언제 가져오셨어!” 순례는 변명한다. 김장할 시기라 배추 시세를 알아보러 시장으로 출장을 갔는데, 생각보다 너무 저렴한 배추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고. 태영이 주말에 같이 김장하자고 말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결국 태영은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순례의 아들 중 잔소리가 제일 심한 넷째 찬용에게 이 모든 실태를 고발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요즘 날이 따뜻해 주말까지 기다리면 배추가 금방 익어버리고 만다는 순례의 말에 태영은 더 나은 해결책을 생각할 수 없었다. 태영은 순례를 이길 수 없다. 대신 태영이 회사 반차를 쓰고 오면 같이 김장하기로 약속했다.


다음날 회사를 조퇴한 태영은 불안한 마음과 함께 순례의 집으로 달려갔다. 순례가 기다려주지 않을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고춧가루와 까나리액젓 냄새가 진동했다. 성격이 급한 순례는 이미 아침에 길용을 호출하여 양념을 만들고는 오전 내내 배춧속을 버무리고 있었다. “아유! 좀 기다리시지.” 태영은 고개를 내젓고 체크 울자켓과 반소매 니트, 검정색 슬랙스를 벗고, 더러워져도 되는 반소매 옷과 순례의 몸빼 바지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 힘을 써야 하는 일부터 처리했다. 배추가 담긴 대야의 물을 버리고 순례 옆에 둔 다음 김치를 다 넣은 통을 밖으로 옮겼다. 그리고 순례와 마주 앉아 배춧속을 버무리기 시작했다.


순례와 태영은 배춧잎 한 장에 태영의 남편 이야기를, 배춧잎 한 장에 순례의 동네 친구 이야기를 버무리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태영은 순례가 그간 담아왔을 수많은 김치를 생각했다.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힘들다는 핑계로 돕지 않았던 지난날을 반성했다. 외롭고도 맹목적인 순례의 사랑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 200포기를 담아 모든 가족에게 나눠줬던 순례는 나이가 들면서 100포기, 50포기, 30포기로 점차 김장의 규모가 작아졌다. 그러나 순례의 사랑만큼은 결코 작아지지 않았다.


그때 순례가 다시 한번 당부했다. “태영아. 할머니 말 명심해라잉. 절대로, 절대로 남자만 즐거우면 안된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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