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호
“… 1번, …하였다. 2번, 나는 … 되었다.”
도로록, 도로록, 내 눈알이 굴러가며 시계를 향했다가, 옆 친구의 연필을 바라봤다가, 내 시험지를 다시 보고는 바로 앞에 있는 선생님의 움직이는 입술을 보았다. 선생님은 어떤 문장을 말하고 있었으며 나와 아이들은 들리는 대로 받아쓰는 ‘받아쓰기 시험’ 중이었다. 하지만 나만 딴 세상에 놓여있다. 내 연필은 멈춰있고 두 눈은 선생님의 입술에 가 있지만 보고 있지 않다. 시험시간은 항상 나만의 공상을 펼치는 시간이었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은 학교 수업이 파하면 갔던 종합학원이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고 있으므로 초등학교 4학년인 나를 방과 후에 돌볼 여력이 되지 않아 이곳에 다니게 했다. 엄마는 이왕 가는 김에 국어에 노출시킴으로서 소통능력이 향상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나는 이곳이 따분했다. 마음 맞는 친구도 없었으며 특히 선생님이 제일 싫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전혀 고려해 보지 않은 편협한 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청각장애인이니 맨 앞자리에 앉으라고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사람은 본인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소리가 크니 보청기를 착용하는 내가 잘 듣는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보청기는 나에게 있어 소리를 증폭시켜주는 보조 수단일 뿐이다. 실제로 독순술*에 의지하는 나는 보청기와 관계없이 그 사람의 입 모양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말 속도 때문에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어느 날, 정기적으로 하는 받아쓰기 시험이 찾아왔다. 나는 과거의 시험에서도 항상 최악의 점수를 받아왔었다. 그게 너무 싫었다. 그런데 그 날 눈을 조금만 들면 바로 앞에 있는 선생님의 책상에서 답안지가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을 흘기듯 살짝 올려보고 보이는 대로 답을 썼다. 그리고 선생님이 읊어주는 입 모양을 따라 답을 맞게 썼는지 대조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받아쓰기에서 고득점을 받았다. 세상에! 나는 바로 이 종이를 들고 엄마에게 가서 자랑했다. 엄마는 나를 업으며 “어이구 잘했다! 우리 딸 천재다!”라고 같이 기뻐했다. 나는 엄마의 환한 미소가 너무 좋았으므로 다음 받아쓰기 시험에서도 선생님의 책상을 훔쳐보았다.
탁!
“너 뭘 보는 거야!”
어린이의 무모하고 위험한 커닝 시도가 들통났다. 칼날 같은 선생님의 음성이 귀에 내리꽂힌 순간 속으로 생각했다. ‘아씨, 망했다!’
선생님은 말했다. 이번 커닝 시도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며 내 엄마에게 전화로 알리겠다고.
수업이 끝나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현관문을 닫고 신발 끈을 풀었다. 그 푸는 시간이 마치 영겁 같았으며,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고, 이마에서는 폭포수 같은 땀이 흘러내려 눈이 미친 듯이 따가웠다.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곧 닥칠 내 미래를 보는 듯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엄마가 막 수화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나는 들리지 않게 된 대신 갖게 된 어떤 재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눈치’였다. 시각적으로 여러 증거를 수집하여 모든 상황판단을 빠르게 끝내는 내 눈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훌륭했다. 엄마는 방금 학원으로부터 그 일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혼나기 싫은 마음에 선수를 쳤다. “엄마, 나 학원 그만 다닐래. 선생님이 싫어, 수업도 잘 못 알아듣겠어…”
뜻밖에도, 엄마가 다가와서 말했다. “그래, 그만두자.” 그러고는 나를 안았다.
그뿐이었다. 걱정했던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학원을 그만두고 수십 년이 흘렀다.
나는 우연히 어느 학원 앞에서 시험지를 쥐고 울고 있는 아이와, 아이를 달래주는 한 여자를 보았다.
아이의 손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시험지에는 ‘0점’이 빨간색으로 크게 적혀있었다.
온화한 얼굴을 한 여자는 울지 말라고 하면서 다정한 손길로 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 뒤는 들리지 않았으나 아마 이렇게 말했으리라.
“잘하고 싶었던 거잖아. 엄마는 다 알아.”
젊은 여자의 등에서 어린 나를 안던 엄마를 보았다. 그때 사실 엄마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그 시절의 나는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라 밝은 아이였지만 장애로 인한 한계에 눈을 막 뜨던 시기였다. 내 안에 우울감과 한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들이 다 다니는 피아노 학원을 졸라서 다녔다가도 박자를 따라가지 못해 그만뒀고, 영어학원을 다녔지만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내 두 눈에 부담스러워한 선생님이 보지 말고 책을 보라고 하여 억울한 마음에 더 이상 가지 않은 일도 있었다. 무궁무진한 꿈을 이야기했던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인지한 시기였다. 나는 서서히 삐뚤어졌으며, 나를 잡고 청인 중심 사회의 문화에 맞추려는 어른들의 말에 반항심을 갖고 어긋나기도 했다.
순식간에 엄마가 나를 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내 뺨과 코를 간질거리던 엄마의 머리카락 속에서 흰 머리를 보았다. 희끗희끗한 새치 몇십 가닥. 젊었던 엄마에게서 없어야 할 그것이 이미 있었다.
아, 엄마는 나를 낳은 순간부터 나보다 더 많은 생의 부침을 경험했을 것이다.
나는 학원가에서 아이를 달래는 젊은 여자의 등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작고 가녀린 그 뒷모습에 대고 고백했다.
엄마, 차라리 나를 혼내고 때리고 화를 내지 그랬어. 그렇게 가슴 속에 쌓인 울화를 풀어내기라도 하지.
하지만 사실 엄마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이게 아닐 것이다.
기어코 나를 길러서 이 세상에 용감하게 보낸 당신을 존경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