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귤
“네 신랑 말이야. 밤에 힘 좀 써잉?”
“아잇! 할머니! 손녀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94년생 민영은 당황스럽다. 43년생 례순은 손녀사위가 남자구실을 잘하는지 궁금했다. 례순은 민영에게 조언했다. 만약 딸을 낳고 싶으면 여자가 즐거워야 한다고. 례순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다. 용대, 용길, 용진, 용찬, 용석. 례순은 즐겁지 못했다.
례순은 18살에 건재를 만나 충북 제천으로 시집을 왔다. 둘째 용길이 고열로 농인이 된 이후, 용길의 교육을 위해 다 같이 서울로 이사했다. 례순과 건재는 좁은 집에서 5명의 아들을 키웠다. 용대, 용진, 용찬, 용석은 모두 대학에 보냈지만, 용길은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는 대학에 가는 것보다 기술을 배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용길은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뜻에 따라 바로 공사판에 뛰어들었다. 용길은 일하는 틈틈이 공부를 병행한 끝에 13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 후 토끼처럼 볼이 통통하니 귀여운 미현과 결혼했다.
례순은 자격증을 연달아 취득하고 결혼까지 한 용길을 보며 놀랐다. 이렇게 잘할 줄 알았으면 아들 뜻대로 하게 둘걸 후회가 되었다. 례순은 차가운 현실보다 오히려 자신의 편견이 심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례순은 둘째 용길과 미현이 낳은 딸, 민영을 유독 아꼈다. 민영이 돌도 되기 전에 농인이 되었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아들에게 했던 과오를 민영에게도 다시 저지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례순이 민영을 아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민영이 례순의 외모를 닮았다는 것이다. 민영을 데리고 나가면 례순의 동네 친구들이 딸인 줄 알았다며 한마디씩 할 정도였다. 례순은 딸이 없는 설움을 민영의 존재로 달랠 수 있었다. 례순은 네이버 검색창에 [조선시대 미인]이라고 치면 나오는 인물과 비슷하다. 쌍꺼풀이 없는 작은 눈과 둥글둥글한 코. 148cm의 작은 키에 넓은 골반까지. 민영은 례순의 외모와 골반을 물려받았지만 조선시대 미인까지 되지는 못했다. 자라면서 용길의 유전자가 뚫고 나오기도 했고, 쌍꺼풀 수술까지 했기 때문이다.
용길과 미현은 결혼하자마자 바로 례순네와 합가했다. 1층에는 례순와 그의 남편 건재가, 2층에는 용길과 미현, 그들이 낳은 민영과 민성이 함께 살았다. 삼대가 함께 사는 다세대 주택에서 례순은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민영이를 볼 수 있었다. 맞벌이하는 아들과 며느리 대신 민영의 밥을 챙겨주기도 했다. 례순은 종종 민영과 함께 김치만두를 빚었다. 그들은 환상의 듀오였다. 례순이 반죽하여 만두피를 만들면, 민영은 빠른 속도로 만두소를 넣고 마무리한다. 쪄서 먹어도 맛있는 만두였지만, 튀긴 만두를 좋아하는 민영을 위해 례순은 자주 만두를 튀겼다. 김장 시즌이 되면 그들은 역시 다시 한번 환상의 듀오가 되었다. 함께 시장에 가서 필요한 재료를 사고, 온 가족이 모여 김장하기 전 소일거리들을 해치웠다.
례순과 민영은 밤에도 같은 이불을 덮고는 꼬옥 안고 잤다. 례순이 민영을 깨워 아침밥을 차리면 민영은 맛있게 먹고 초등학교로 등교했다. 민영은 학교에서 돌아와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저녁밥도 함께 먹고, 쾌걸춘향도 함께 시청했다. 자막이 없어 드라마의 내용은 몰랐지만 배우의 표정과 몰입하는 례순의 표정이 재미있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둘의 관계는 민영이 교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했다. 민영은 숙제가 많다는 이유로, 또는 책을 읽고 싶다는 이유로 등을 들어 위에서 2층에서 자는 날이 늘어났다. 례순은 민영에게 자신이 더이상 우선순위가 아님을, 늘 함께 있을 수 없음을 알았다. 민영은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집에서 례순과 밥을 먹었지만, 례순은 둥지 안에 있던 아기 새가 이제 자신의 품을 떠나고 있음을 느꼈다. 례순은 씁쓸했지만 괜찮았다. 그래도 민영이 하루에 한 번은 꼭 례순의 집에서 밥 한 끼를 먹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직장인이 된 민영은 야근에, 회식에, 연애에, 약속으로 례순과 함께 하는 날이 더 줄어들게 되었다. 례순은 20대 민영의 호시절이 궁금하면서도 그저 흐뭇하게 지켜봤다. 오랜만에 민영이 집에 있는 날이었다. 례순은 민영이 김치볶음밥을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다가 손녀의 얼굴에 우환이 가득한 것을 알아챘다. 례순은 민영의 얼굴만 봐도 민영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다. 민영이 애써 밝은 척 회사나 요즘 화제가 된 누구 등으로 주제를 돌려도, 례순의 눈에는 민영의 그늘이 짙게 보였다.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게야? 우리 손녀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두울까.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 걱정되네.” 민영은 례순이 깎아준 사과를 먹다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헉. 어떻게 아셨어요? 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행복하지 않은 게 맞나봐요. 할머니. 저….” 힘든 연애를 하고 있던 민영은 곧이어 눈물이 차오르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었다. 례순은 민영을 꼭 안아주며 무엇보다 너의 마음이 행복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민영은 그 길로 애인과 헤어지고 6개월 정도 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이윽고 감자 도리처럼 동글하니 귀엽고 우직한 태혁을 데려오더니 사귄 지 9개월 만에 결혼했다. 례순은 민영의 급작스러운 결혼 선포에 적잖이 놀랐지만 민영의 선택을 믿었다. 10년 동안 친구였다고 하니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례순은 태혁을 보자마자 그의 볼과 뒤통수를 만지고 꼬옥 안아주며 말했다. “우리 손녀사위, 오늘 처음 봤지만은 딱 우리 식구 같어. 어쩜 그러지?” 례순은 태혁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나중에는 이런 말까지 했다. “나는 민영이보다 우리 손녀사위가 더 좋아. 껄껄껄. 민영아, 할머니가 이러는데 질투 안나? 으응?”
한동안 민영은 태혁과 주말 부부 생활을 했다. 례순은 주말이 될 때마다 민영을 대전으로 내려보내며 아기 새들이 밥은 잘 차려 먹을까, 살림은 잘할까, 시댁에 밉보이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을 했다. 머지않아 주말 부부 생활이 끝나면, 민영은 아주 대전에서 살게 될 것이다. 례순의 마음은 좋았다가도 슬펐다. 례순은 다시 한번 민영을 보내주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민영에게 김장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평소처럼 퇴근하고 례순의 집으로 간 민영은 현관에서 큰 대야를 발견했다. 그는 이 대야가 창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 언제인지 잘 알고 있었다.
민영이 성난 숨과 함께 현관문을 발칵 열었다. “할머니! 왜 말도 안 하고 김장해요! 뭐야. 배추는 또 언제 가져오셨어!” 례순은 변명했다. 김장할 시기라 배추 시세를 알아보러 시장으로 출장을 갔는데, 생각보다 너무 저렴한 배추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고. 민영이 주말에 같이 김장하자고 제안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민례의 아들 중 잔소리가 제일 심한 넷째 용찬에게 일러바칠 거라고 으름장을 놓아도 례순은 완강했다. 이미 배추를 절인 후라 주말까지 기다리면 배추가 금방 익어버리고 말거라는 례순의 말을 민영은 이길 수 없었다. 대신 민영은 회사 반차를 쓰고 와서 김장을 돕기로 했다.
다음날 회사를 조퇴한 민영은 불안한 마음으로 례순의 집을 향해 달렸다. 례순이 기다려주지 않을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고춧가루와 까나리액젓 냄새가 진동했다. 성격이 급한 례순은 이미 아침에 용길을 호출하여 양념을 만들고는 오전 내내 다 만든 소를 배춧잎에 바르고 있었다. “아유! 좀 기다리시지.” 민영은 고개를 내젓고 체크 울자켓과 반소매 니트, 검정색 슬랙스를 벗고, 더러워져도 되는 반소매 옷과 례순의 몸빼 바지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 힘을 써야 하는 일부터 처리했다. 배추가 담긴 대야의 물을 버리고 례순 옆에 둔 다음 김치를 다 넣은 통을 밖으로 옮겼다. 그리고 례순과 마주 앉아 배추를 버무리기 시작했다.
례순과 민영은 배춧잎 한 장에 민영의 남편 이야기를, 배춧잎 한 장에 례순의 동네 친구 이야기를 버무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민영은 례순이 그간 담가왔을 수많은 김치를 생각했다. 외롭고도 맹목적인 례순의 사랑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 매년 200포기나 되는 김치를 거뜬히 담아 모든 가족에게 나눠줬던 례순. 나이가 들면서 례순의 김장 규모는 100포기, 50포기, 30포기로 점차 작아졌다. 그러나 례순의 사랑만큼은 결코 작아지지 않았다.
그때 례순이 다시 한번 당부했다. “민영아. 할머니 말 명심해라잉. 절대로, 절대로 남자만 즐거우면 안된다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