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
일 년간의 취업 준비 끝에 취직에 성공했다. 발령이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부모님께서는 집에만 있는 내가 안쓰러워 그간 취업 준비하느라 애썼으니 해외여행을 다녀오라고 말했다. 취직 전의 마지막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던 나는 여행을 가기로 결심했다. 해외를 혼자서는 갈 자신이 없어 동행자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행자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친구들은 아직 사회 초년생인 데다가 일주일 휴가를 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대로 취직 전 마지막 여행이 무산될 수도 있음에 상심하고 있던 차에 부모님이 그럼 오빠랑 같이 가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마침 오빠도 이직을 앞두고 있어 집에서 쉬고 있었다. 혈육과의 여행이라니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우리 남매는 연년생이다. 그래서인지 유년기 때의 우리는 자주 치고받았다. 주로 텔레비전 리모컨과 컴퓨터 자리 사수를 위해 싸웠다. 오빠는 만화를 좋아했고, 캐릭터끼리 싸우는 게임을 좋아했다. 반면에 나는 소리를 듣지 못하니 사람의 입모양이 잘 보이는 드라마를 좋아했고, 캐릭터를 꾸미는 게임을 좋아했다. 서로의 취향이 달라 함께 놀 수가 없으니 싸우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싸움의 끝은 한 명의 눈물이었다. 어느 날은 첫째라는 이유로 원치 않는 양보를 해야만 했던 오빠의 눈물이었고, 어느 날은 부모님께서 내가 아닌 오빠의 편을 들어준 것이 분했던 나의 눈물이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나서부터는 치고받았던 때가 있었다는 게 무색할 만큼 서로 필요한 용건이 아니면 찾지 않았다. 가끔은 심심할 적에 잘 준비를 마친 사람의 방에 가서 불을 켜고 온다든가, 다급하게 불러놓고 무시한다든가 유치한 장난을 치는 걸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가깝고도 먼 사이의 남매끼리의 여행이 괜찮을지 심히 걱정되었다. 해외까지 가서 싸우면 어떡하지. 싸움을 말려줄 엄마도 없는데. 그냥 오빠가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지. 걱정거리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취직 전 마지막 여행을 이런 이유로 포기할 수는 없어 그렇게 우리는 태국의 방콕으로 남매 여행을 떠났다.
인천공항에서부터 여섯 시간을 날아 태국에 도착하였다. 여행은 비교적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이동하는 내내 "더우니까 떨어져 줄래?", "오빠는 사진을 이렇게밖에 못 찍어?" 서로 이런저런 이유로 투닥거렸지만. 호텔에서 짐을 풀고 바로 방콕의 유명한 야시장인 딸랏 롯파이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길거리에는 차와 오토바이가 빼곡했으며, 지하철역에도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야시장으로 향하는 지하철 표를 사기 위해 창구 앞의 대열에 합류했다. 표를 사기 위해서 동전이 필요했는데, 지갑 속의 동전이 부족했다. 이에 오빠가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오겠다면서 줄 잘 서고 있으라며 당부했다. 내 앞의 사람들이 하나둘 줄어들고 있는 만큼 불안감도 커져만 갔다. 오빠를 찾기 위해 제자리 뛰기도 하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지만 내 앞에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오빠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맨 뒤로 가서 다시 줄을 섰다. 뒤늦게 나타난 오빠가 여전히 뒤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왜 여기에 있어?"
"오빠가 안 와서 다시 뒤로 왔어."
"......"
나의 대답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검지로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빠-가-?"라고 말했다. "란아, 이럴 때는 뒷사람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말하면 되잖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오빠의 말에 이런 방법도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그리고 기분이 나빠졌다. 좀 전의 상황을 곱씹어 생각하니 오빠가 친절하게 방법을 알려주는 듯 했지만 말투 속에 묘하게 비꼼이 들어있었던 것 같아서.
야시장 인근의 지하철역에 내려서 인파를 따라 걸으니 형형색색의 천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 우리가 갈 야시장임을 알아보았다. 개장 시간에 맞춰서 방문한지라 야시장에 다다를수록 상인들이 하나둘 가게를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맛있는 음식을 구워대니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중에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 게 있었다. 태국의 길거리 음식으로 유명한 로띠라는 음식이었다. 로띠는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그 안에 바나나, 망고, 코코넛 등의 토핑을 넣고 기름에 튀긴 다음, 네모 모양으로 반듯하게 접어 그 위에 연유를 뿌려 먹는 간식이다. 로띠에 홀린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는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우리도 줄에 합류하여 차례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우리의 차례가 되었을 때 계산을 하기 위해 지갑을 찾았다. "어?" 닫혀있어야 할 가방이 열려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가방이었기에 뭐가 없어졌는지 단번에 보였다. 동전 지갑이 없어진 것이다. 믿을 수가 없어 가방을 다시 뒤져보지만 여권만이 덩그러니 만져질 뿐이었다. 눈앞의 상황이 거짓이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떠보지만 똑같았다. 또 오빠의 꾸중을 들을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오빠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량한 모양새로 동전 지갑이 없어졌음을 실토하고 욕먹을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오빠가 가방을 다시 닫아주며 "그래도 여권이 있는 게 어디야. 동전 지갑만 없어진 거지, 나한테 현금이 있으니까 괜찮아."라고 위로를 하는 것이었다. 꾸중이 아닌 위로의 말이 돌아와서 조금 당황하였다. 연달은 실수에 의기소침한 나에게 괜찮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였다.
그 순간만큼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하찮은 장난을 걸어오던 오빠가 아니었다. 오빠 다운 면모가 가뭄에 콩 나듯 나타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러한 상황이었다. 이게 오빠의 진짜 면모이기도 했다. 오빠는 내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면 해결사처럼 등장하여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평소처럼 장난을 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이럴 때는 귀신같이 장난을 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오빠의 면모를 좋아한다. 그런데 오빠는 본인을 좋아할 시간을 오래 주지 않는다. 로띠를 먹으며 금세 괜찮아지니 오빠의 장난도 다시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내가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 물건을 놓고 자리를 뜬다든가, 계산 실수를 한다든가 할 때마다 어김없이 오빠는 관자놀이에 검지를 대며 입모양으로만 "빠-가-?."라고 말했다. 이번 여행 동안 난 몇 번의 빠가 소리를 들었는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