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핸드스피크 Feb 26. 2024

가짜 첩보원의 면접일지

주영

면접을 보는 날이다. 일주일 전에 새로 장만한, 선이 날카롭게 서 있는 뻣뻣한 새 옷을 입고 면접장으로 갔다.


널따란 강당에서 똑같은 검정색 정장을 입은 무리들이 가로세로 줄지어 앉아 있다. 이 고요하고 숨막히는 질서 속에서 나는 영화 가타카의 ‘빈센트’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우성유전자만 신봉하고 우대하여 유전자로 직업, 결혼, 서열 등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에서 열성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빈센트가 다른 사람의 유전자로 위장하고 취업할 때 지금의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마치 내가 위장한 스파이가 된 듯, 알 수 없는 자아 분리를 느끼며 정신없이 내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암호 같은 서술형 문제를 해독하여 답을 쓰고, 파티에서 웨이터인 척 악당의 옷 사이에서 스윽 다이아를 훔치는 어느 영화 속 요원처럼 면접관의 마음을 훔치려고 ‘작업’했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했다. 면접장을 나왔는데 너무 아쉽고 서러워서 눈물이 갑자기 콸콸 흘렀다. 기껏 대구에서 서울까지 왔는데 이렇게까지밖에 하지 못했나! 하는 자기비하와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후련함이 질척하게 내 발목을 잡았다. 그 간의 고난과 분투의 역사가 필름 영사기처럼 눈앞을 찰칵 찰칵 지나간다. 세상을 힐난하는 노래 가사가 뇌 속을 후벼파며 전두엽, 후두엽, 그 어디를 구석구석 지나가고 혈관 속으로 흘러간다. 나는 무엇 하러 여기에 있는가 아아


그 옷은 면접 이후로 한 번도 입은 적 없다. 그 날의 후덥지큰한 공기와 어색한 수어, 허공에 흩뿌려진 나의 단어들, 면접관 뒤로 나에게까지 비치던, 그래서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던 그 햇빛 밖에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방에 처박아두고 회피하며 당장 눈앞에 놓인 나의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아냈다.


치열하게 살고 난 어느 한여름 밤,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그 옷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입을 수 있었다. 그 옷은 새 옷처럼 여전히 뻣뻣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서야, 그 옷이 뻣뻣한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늘 침착하고 차분한 분이었다. 당신의 인생을 살아오며 정립한 삶의 이치 중 하나는 '큰 소리를 내는 것은 내가 불리함을 인정하는 꼴'이라고 생각하는 어른이었다. 늘 목소리가 크고 소란스러웠던 내게 '차분하게 행동해라'라고 거듭 말했던 엄마는 내가 그렇게 사시나무같이 떨었던 면접날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뻣뻣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날 면접장을 나오며 내 눈물은 옷소매와 치마를 적시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을 때, 내 머릿속만치로 모든 게 일그러진 시야 속에서 엄마를 보았다. 저 멀리서 나만큼이나 일그러진 눈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분열이 그녀의 눈가에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서 미래에서 온 나는 그 눈 속에서 진짜 엄마를 본다.


그 옷의 뻣뻣함은 엄마와 같다. 새벽같이 일어나 옷에 물을 뿌리고 다리미로 칙칙 다리던 그 손과 같다. 딸에게 운명과도 같은 그 아침을 위한 엄마의 걱정과 한숨이 옷에 선을 내리고 예리한 각을 만들었다.


그 옷은 여전히 뻣뻣하다. 내 방은 눅눅하고 습해서 옷들이 쉽게 상하는 환경인데도 그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그 옷만큼은 곰팡이가 슬지 않았다. 되려 어두운 방 안에서도 자기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엄마가 계속해서 빨고 다려왔던 것처럼.

작가의 이전글 옷이 뭐 대순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