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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Feb 28. 2024

조심해, 그렇지 않으면 처녀귀신이 너를 잡으러온단다.

주영

스노보드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손목으로 꽝! 하고 넘어져서 병원에 갔다. 세상만사가 권태로운 듯한 얼굴의 의사가 나를 진단했다. 병명은 염증이 심각한 손목건초염. 손목에 부목을 대고 물리치료를 받으라는 명이 내려진다.

“ 저… 팔 운동은 해도 되나요? 언제까지 와야….”

“호전될 때까지 매주 정해진 시간에 오시고 약은 5일치 처방해드릴게요.”

 내 질문을 자르고 모니터에 할 말을 빠르게 타이핑하는 의사는 손을 댔다간 베어버릴 것 같은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질문을 삼키며 “넵, 감사합니닷.” 하고 쭈뼛쭈뼛 일어서서 나갔다. 그런 다음 물리치료사를 기다리며 속으로 그 의사의 무정함을 뜯고 욕한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그런 태도는 뭐람!

 그러다 시선 끝에 무언가 걸린다. 처치실 한쪽에서 한쪽 팔 다리 전체 깁스를 한 아이와 조금 전의 정 없는 의사가 마주보고 앉아있다. 아이는 생리적인 아픔보다도 깁스를 칭칭 감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더 놀란 듯,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눈물로 범벅된 아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아마도 나아질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이리라.  그도 그럴게 아이는 겁에 왕창 질려있었으며, 의사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그 눈빛은 마치 숭배하는 신을 보는 진리의 구도자처럼 애달프기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아이의 상태가 한 눈으로 봐도 처참해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몇 분 전 의사의 차가운 태도로 보건데 십중팔구 의사가 그 애절한 눈빛을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가 곧 받을 충격에 미리 안타까워하고 있던 찰나에, 의사가 입을 열었다.

 

“일주일동안 약 잘 먹고 잘 자면 다음 주에 깁스 풀 수 있어. 그럼 할머니 집에 놀러갈 수 있을거야.”

뜻밖에도 그 음성에는 온기가 흘러넘쳤다. 나는 무척 놀라워하면서, ‘어디를 봐도 최소 전치 4주감인데…?.’ 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그의 입술을 읽을 수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의사가 아이에게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기 때문이다, 안심하라는 듯이.

 의사는 아이를 위한 거짓말을 했다. 믿음과 기대를 이용한 플라시보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느니, 나이가 어릴수록 재생과 회복능력이 월등하다느니 하는 과학적 근거 따윈 머릿속 안드로메다로 날려보내고 나는 그저 몰두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서늘한 옆얼굴이 다정으로 물드는 광경을 목격했으므로.

 의사의 뒷모습에서 어린 시절 내 주치의 선생님과 겹쳐보았다. 자주 잔병치레했던 어린 나는 아주 안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불안이 극에 달하면 손톱을 뜯는 것이다. 피날 때까지 기어코 뜯고야 마는 아이에게 내 주치의는 그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밤에 자는 사이에 머리카락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처녀귀신이 어흥! 너를 잡으러 올 거라고 겁을 주었다.  훗날 나는 이 이야기의 내막에 엄마의 은밀한 사주가 있었으며, 내 버릇을 바로잡기 위해 선생님과 엄마가 협력한 모종의 작전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입이 시뻘건 처녀귀신이 정말로 무서웠으므로 자라는 동안 손톱을 뜯지 않았다. 그렇게 내 손톱은 피부를 다 덮을 만큼 건강하게 자랐으며, 덩달아 내 마음 속 불안도 차츰 사라져갔다.

돌이켜보면, 주치의는 정말로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그 와중에 처녀귀신까지 끄집어내 재치있게 이야기하는 아량을 베풀지 않았으리라.

 순식간에 과거를 더듬어보고 온 나는 그렇게 몇 십분 전 의사의 무정한 태도를 용서하게 된다. 내 맘대로 죄를 부여하고 그 죄를 사하는 것이지만…!

 다음 주 이 시간 병원에 와서 후처치를 받아야 하기에 또 서슬퍼런 얼굴을 마주하겠지만 다른 아이에게 다시금 마법의 거짓말을 할 그 옆얼굴을 상상한다. 의사는 아이에게 치유가 되고 새살이 솔솔 돋는 마술을 부릴 것이다.

 그렇게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애정어린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그 속에 숨겨둔 온정을 받아먹고 쑥쑥 건강하게 자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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