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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해석가 Oct 21. 2021

코미디언과 닥터 맨해튼

<왓치맨> 해석

 '히어로'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크립톤 행성에서 온 슈퍼맨? 엄청난 재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아이언맨? 감마선에 노출된 헐크? 이들은 모두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서 악(堊)을 처벌합니다. 1920년대 후반, 슈퍼히어로 코믹스가 처음 등장한 이래로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는 선과 악의 대비가 극명한 캐릭터가 인기였습니다. 악은 선에 의해서 처벌받는 권선징악의 주제가 강조되었죠. 이후 세계관이 넓어짐에 따라서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죠. 2000년대부터는 할리우드 자본과 코믹스가 만나 히어로 영화라는 장르가 만들어집니다. 이에 따라 다시 선과 악이 극명한 캐릭터로 회귀합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입체적 영화 캐릭터가 탄생했습니다. 오늘 다룰 <왓치맨>이 대표적입니다.


 1985년 냉전 시대, 왓치맨(Watchmen)의 구성원인 코미디언이 자택에서 추락하여 사망합니다. 이를 수사하던 로어셰크는 '왓치맨 사냥꾼'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옛 동료였던 나이트 아울과 실크 스펙터, 닥터 맨해튼에게 알립니다. 한편, 오지만디아스는 히어로 신분을 이용한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합니다. 재력을 바탕으로 닥터 맨해튼과 함께 깨끗한 무료 에너지원을 개발하는 사업을 진행하죠. 닥터 맨해튼이 인간에게 회의감을 느끼고 지구를 떠난 동안, 홀로 수사하던 로어셰크가 덫에 걸려서 수감됩니다. 나이트 아울과 실크 스펙터는 히어로 활동을 재개하고 로어셰크를 구합니다. 이들은 모든 사건의 배후에 거대한 세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왓치맨>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봅시다. 영화는 로어셰크의 저널에 나온 대로 1985년 10월 12일부터 시작합니다. 1970~80년대는 냉전 체제가 악화되던 시절입니다. 무기와 우주 개발에 두 강대국이 경쟁적으로 박차를 가했죠. 미국과 소련은 상대국으로부터 언제 선제공격이 들어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밤낮으로 강한 무기를 개발합니다. 공통적으로 관심을 가진 무기는 바로 핵무기였죠. 이들은 핵무기가 양날의 검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핵무기의 위력을 본 전 세계는 핵전쟁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혔죠. 왓치맨은 이런 불안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영화에서 전쟁과 무기, 핵에 대한 암시가 지속적으로 제시되는 이유입니다.


 <왓치맨>을 이끌어가는 주인공 중 닥터 맨해튼을 살펴봅시다. 우연한 사고로 능력을 얻은 그는 신과 견줄 능력을 가집니다. 닉슨 대통령은 닥터 맨해튼을 활용하여 베트남 전쟁을 승리하죠. 닥터 맨해튼의 상징은 이마에 그려진 수소 원자입니다. 중심에 핵이 있고 전자 하나가 그 주위 궤도를 운동하는 모습이죠. 닥터 맨해튼은  수소 폭탄, 더 나아가서 핵폭탄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사고를 당하기 전, 존 오스터먼은 시계공을 꿈꿉니다. 아버지가 시계공이었기 때문이죠. 시대가 바뀌고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아버지는 존에게 과학을 공부시킵니다.(원작 만화에 잘 묘사되어있습니다.) 과학은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하나의 기술을 인간에게 도움이 되도록 개발할 수도, 파멸로 이끌 무기로 개발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는 핵 기술을 개발하면서 핵 무기를 국제적 갈등을 타파할 궁극적인 해답으로 여겼습니다. 인류는 핵 무기를 신격화했죠. 닥터 맨해튼이 신의 능력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닥터 맨해튼은 핵 폭탄 자체를 의미함과 동시에 외부에서 바라보는 미국을 상징합니다. 대부분의 일에 개입하고 있으며 국가적으로 거대한 힘을 행사하기 때문이죠. 이와는 반대로, 미국 내에서 바라보는 미국의 모습은 코미디언으로 상징됩니다. 코미디언은 왓치맨 전부를 조롱하고 조소합니다. 그는 미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에 개입하였죠. 코미디언의 특징은 로어셰크가 옮기는 농담에서도 잘 묻어납니다.

Man goes to doctor. Says he's depressed. Life seems harsh, and cruel. Says he feels all alone in threatening world. Doctor says: "Treatment is simple. The great clown - Pagliacci - is in town. Go see him. That should pick you up." Man bursts into tears. "But doctor..." he says "I am Pagliacci." Good joke. Everybody laugh. Roll on snare drum. Curtains.

 한 남자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갑니다. 그는 인생이 가혹하고 잔인하다고 말합니다. 우울해하는 남자를 보며 의사는 "위대한 광대 파글리아치를 찾아가보세요. 그가 당신을 웃게해 줄겁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눈물을 보입니다. "의사 선생님... 제가 파글리아치입니다." 코미디에는 본질적으로 조소와 우울이 깔려있습니다. 광대의 웃는 얼굴 뒤에는 우울한 내면이 숨어있죠. 광대는 재미있고 화려해보이기 마련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터프하고 강해보이며 모든 일을 처리하는 막강한 국가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범죄와 우울로 가득 차있습니다. 특히 1970년대 미국은 이런 모순이 극에 달하던 시대입니다.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와 로어셰크의 대사에도 잘 묻어나죠.


 <왓치맨>에서 시계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왓치맨(Watchmen)이라는 이름 그 자체, 닥터 맨해튼이 만드는 시계, 둠스데이 클락은 모두 시계에 대한 암시이죠. 시계는 연속적입니다. 오전 12시가 된 이후에는 다음 날이 시작됩니다. 시계는 순환하며 하루하루를 정의합니다. 이런 날들이 모여서 역사를 만들죠. 어쩌면 당연하게도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으로 몰락했습니다. 히틀러도 같은 이유였죠.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백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쳤습니다. 고종도 아관파천을 했으며, 이승만 전 대통령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죠. 시계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극적인 역사의 순환을 상징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듯, <왓치맨>도 세계의 거점 도시에 핵이 폭발하며 마무리됩니다. 왓치맨 전반에 깔려있는 무력감은 바로 이런 역사적 순환에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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