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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린 May 11. 2022

태양의 묵념

금동대향로

태양은 지긋지긋하다는 단어를 읊조렸다. 오랜만이었다. 지와 긋을 여러 높낮이로 반복하면서 지긋지긋이 힘을 축 빼고도, 힘을 팍 주고도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제야 지긋지긋하다가 태양에게 돌아왔다. 이건 태양의 흑점만큼 많은 태양만의 시간 죽이기 방법이었다. 단어를 완전히 잊었다 다시 기억해보기. 지긋지긋은 제일 잊어버리기 어려운 단어였다. 태양이 아는 단어 중 태양을 제일 잘 표현해주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지긋지긋을 잊어버리는건 태양이 제일 아끼는 시간 죽이기 놀이였다. 그렇게 아꼈는데도 태양이 잊어버린 지긋지긋의 수를 200자 원고지에 옮겨쓰면 대한민국의 모든 벽을 덮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여러분은 안믿을지도 모르지만, 태양은 한국의 문화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원주민에 가까울 정도였다. 태양이 보다 젊었을 때 지구의 모든 언어를 공부하면 시간이 잘 가겠다 싶어서 지구를 바라봤을 때를 기준으로, 글자에 동그라미가 제일 많아뵈는 언어가 한글이었다. 이 이야길 듣고 여러분이 웃든 말든 그랬다. 생각보다 한 언어를 완전히 이해한다는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오히려 시간이 안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언어에 대한 관심은 접어버렸지만, 한국어만큼은 수준급이었고(대학 전공 교수를 할 정도는 됐다) 자연스레 문화도 사회도 잘 이해했다.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으니까 더욱. 뭐 한국어를 배우면서 다른 언어권이 본인을 썬이나 쏠라 등으로 부른다는 정도는 알았으나 태양은 태양이란 이름이 좋았다. 사람들은 개구진 어린아이 역할에 태양이란 이름을 붙였다. 요즘은 그것도 철이 지난 것 같지만.


지구의 멸망을 기대한 적이 있었다. 모든 역사가 겉멋 들고 요란뻑쩍 했으니(태양은 요란뻑적이란 단어도 안다!) 마지막도 화려할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추잡스럽고 지지부진하게... 태양은 예상치 못했다. 고래의 초음파 소리에 태양의 내피가 찢어질 듯해 귀를 닫은 지도 오래였다. 지구의 종말을 열심히 치장하는 인간들만이 구역질나는 발전을 하고 있었고... 태양은 인간이 달에 간 기념으로 그들에게 불쾌함이나 호의를 가지길 포기했다. 그냥 그들의 다음 세대를 위해 묵념을 했다. 그건 딱 15초의 묵념이었다*


지구는 곧 멸망할 것이다. 그럼 태양의 머릿속에 있는 한국어는 지켜야 할까, 잊어야할까. 태양은 꾸벅꾸벅 졸면서도 잠이 안오면 그런 생각을 했다. 한국이 없어지면... 지긋지긋을 쓰는 건 태양밖에 없고... 그럼 지긋지긋마저도 태양에게 지긋지긋해지겠지... 하지만 항상 그런 생각에 미치기 전에 태양은 잠이 들었다. 머리에 과부하가 오기 쉬운 생각이어서... 잠이 잘 왔고... 흑점 하나가 지구 쪽으로 아주 작은 불똥을 팟 튀었다.



(*1969년 7월 29일 국제표준시 기준 2시 56분 15초에 아폴로 11호에서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딛었다. 한편 1967년 1월 27일 아폴로 1호에서 시험 도중 화재가 발생한지 15초 안에 승무원 거스 그리섬, 에드워드 화이트, 로저 채피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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