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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Nov 16. 2022

어느새부터 후배들이 자꾸 나에게 고백을 한다

탈꿘연대기 (2)

한 선배가 나와 나의 동년배들에게 말했다. “사람을 조직화하려면 그 사람과 연애를 하듯이 해야 한다!” 우리들을 그 말을 철썩같이 따랐다. 후배 한 명을 조직화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연락을 하고, 오늘은 어떤 감정인지를 물어보고, 집회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꼬박꼬박 물어보고, 만약 참석을 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단순히 표면적인 이유를 넘어서 심리적인 이유와 사상적인 이유까지 분석했다. 그리고 그 후배에 대하여 알게 된 모든 지식들을 선배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느날부터인가 후배들이, 특히 남자 후배들이 나에게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조직화를 위해서 관심을 기울여왔는데, 후배들은 내가 이성적으로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왕왕 벌어졌다. 후배의 고백을 거절하는 것도 지쳐 나중에는 이성적으로 호감을 보일 만한 일체의 행동을 자제해왔다. 그랬더니 이번엔 한 선배가 나를 나무랐다. “너는 지금 제대로 조직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호통을 쳤다.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관심을 기울이면 이성적인 호감으로 받아들이는 남자 후배들과, 연애하듯이 사람을 챙기며 사업을 하라는 선배들 사이에서 나는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저 그 후배에게 인간적인 호의를 보여줬을 뿐인데도 혼자서 나와의 미래를 상상하는 남자 후배들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사람을 하나의 조직 속에 녹아들게 만드는 작업인 ‘조직화’라는 행위를 연애에 비유하는 선배들의 언행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개인을 조직에 녹아들도록 하기 위해서 ‘조직화’라는 작업이 필요하다면, 먼저 조직에서부터 그 개인이 함께 하고싶어 할 만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이러한 고민들을 제쳐두고 한 개인에게 다른 개인을 책임지도록 하면서, 가장 보편화된 사회적 수행이자 고강도의 감정노동인 ‘연애’라는 방식을 통해서 사람을 하나의 조직으로 녹아들도록 하는 것은 기만적이라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그리고 이러한 고강도의 수행과 노동을 활동가의 덕목으로 추켜드는 것은 활동가를 고갈시키기에 충분한 원인이 된다.


또한 한 가지의 의문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이러한 조직화에 특화된 존재들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내 또래의 남자 동기들은 하나같이 조직화에 대하여 선배들에게 피드백을 받고, 자기 반성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실패하고 여전히 못한다. 남자 선배들도 술자리에서 사실은 자신도 이러한 조직화(a.k.a 사람사업)을 못해서 여자인 선배들로부터 끊임없이 혼나 겨우 나아졌다고 고백했다. 고강도의 감정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곧잘 해내곤 한다. 그러므로 조직화의 대표적인 책무는 여성이 짊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마 이 문제는 사회적으로 여성이 타인의 감정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그에 반응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드는 것은 왜 하필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신념에 대한 문제에서도 ‘감정’이 주요 쟁점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 이유는 결국 조직화라는 개념을 ‘조직화 하고자 하는 대상’과 어느 정도 친밀감을 쌓은 후, 그 대상이 가지게 되는 일종의 친밀감을 이용해 조직에 대한 일종의 편견을 넘어서서 조직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으로 납작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배들이 요구하는 조직화의 기준은 내가 그 대상들과 친밀감을 쌓는게 아니라, 그렇게 쌓은 친밀감을 바탕으로 ‘우리’의 조직으로 넘어오게 한 대상이 몇 명이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친밀감을 아무리 쌓더라도 조직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들은 대상일수록 조직의 일원이 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직화에 실패한 ‘나’의 문제인가, 아니면 ‘조직’의 문제인가. 선배들은 항상 전자를 꼬집어 나의 ‘역량’을 탓했다. 선배들에게 나는 항상 조직의 목표에 미달하는 존재였고, 선배들은 그런 나에게 노력이 부족하다고 더 노력하라는 평가를 하곤 했다.


여기서 나는 운동권의 조직화 방식에 대하여 한 가지 더 꼬집어보고싶다. 선배들에게 종종 조직화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물으면, 선배들은 하나같이 ‘같이 술을 마셔라!’고 대답했다. 물론 술은 어느 정도 경계심을 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사적인 관계에서 서로 속마음을 터 놓을 때 술의 힘을 빌리곤 한다. 그런데 조직화의 전략으로 술을 사용하는 것은, 강제로 경계심을 풀게 한 뒤 가정사나 개인적인 힘듦을 털어놓게 만들어 그 사람의 약점을 파고드는 행위로 조직의 일원이 되도록 계획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친밀감을 쌓는다기보다는, 서로의 약점을 공유하여 ‘동맹’을 맺고자 하는 시도이다. 나는 이러한 운동권들의 조직화 방식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술자리에서 있었던 모든 이야기들은 모두 조직으로 공유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술을 통해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내는 것을 조직화의 성과로 여긴다는 점에서 특히나 그러하다.


술을 통한 조직화의 위험성은 다음과 같은 맥락때문에 위험하다. 먼저, 고립된 환경이라는 점이다. 개인의 내밀한 속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운동권들은 끊임없이 술을 권한다. 술집이 마치는 시간까지도 술을 마시자고 권유하며, 상황이 마땅치 않을 경우에는 자신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자고 권하기도 한다. 거절하면 난감한 방식으로 몰아가며 어떻게든 술을 마시자고,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함께 이야기하자며 강권한다. 문제는 이렇게 고립된 상황이 생기면 생길수록 성폭력이 일어날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는 것이다. 음주를 통한 조직화는 성폭력의 가능성을 촉진시키기에 위험하다. 운동권 내 성폭력의 대부분의 경우는 음주를 하던 환경에서 발생하며, 가해자의 공간에서 주로 발생한다. 추측해보자면, 음주를 통한 조직화 활동을 하다가 성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운동권 조직은 가해자만 탓할 뿐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음주 조직화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일종의 꼬리 자르기인 것이다.


그리고 조직화를 통한 가스라이팅의 문제와 ‘운동권 내 짝짓기 문화’에 대해 꼬집어보고자 한다. 나는 아마 여성이었기에 남성 후배들의 고백이 난감한 부분으로 남아왔던 것 같지만, 남성 선배들은 이러한 조직화 전략을 사용해 ‘새내기’라고 불리는 20살 초반의 어린 여자 후배들과 사귀는 경우가 많았다. 나에게 있어서 남성 후배와의 스캔들(?)은 나의 활동에 불명예스러운 것이었지만(내 뒤에선 나를 향해 여지를 뿌리고 다니는 여우같은 년이라는 험담이 나돌았다), 남성인 선배들에게는 조직화를 통해 여자친구(그것도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를 사귀게 되면 오히려 ‘능력자’라는 칭찬이 붙었다. 나는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까지만 해도 알 수 없었고, 여자인 내가 처신을 잘 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 문제가 일종의 젠더 권력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조직화’를 위해 대상을 가스라이팅 하며 생긴 결과, 남성인 선배가 상대적으로 더 어린 여성 후배와 연애를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앞서 나는 운동권의 가스라이팅이 주체를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주체가 되는 대상인 ‘어린 여자 후배’는 생애 경험에서 자존감이 고양되는 경험을 한 적이 드물고, 고양시키는 사람이 ‘남성 선배’인 경우 높은 확률로 두 사람은 연애라는 결말을 부르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젠더 규범과 운동권 가스라이팅이 만들어낸 일종의 합작인 것이다. 종종 다른 선배들은 ‘조직화하라고 보내놨더니 A(남성 선배)는 연애질만 한다’고 뒷말을 하곤 했는데, 이것은 그 구조에 대해 성찰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렇게 남성인 ‘선배’가 운동권 내에서 자신과 연애(혹은 결혼)할 ‘여성’인 상대방을 찾는 행위에 대해서는 따로 이름을 지었는데, 나는 이를 ‘운동권 내 짝짓기 문화’라고 명칭하고자 한다.


‘운동권 내 짝짓기 문화’라고 명명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운동권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아마 지금 내가 어떤 현상을 꼬집어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 대강 이해가 될 것이다. 혼자서 이러한 이름을 붙이고 나서 운동권에 속했었던 다른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모두가 하나같이 꺄르르 웃으며 이런 문화를 접해본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전제를 깔고 들어가자면, 내가 있었던 조직은 지극히 헤테로 중심적인 문화의 조직이었으므로 내가 앞으로 이야기하는 내용도 헤테로 중심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조직들도 내가 속해있었던 조직과 마찬가지로 헤테로 중심적인 문화가 있음을 보고 들은 바 있기에, 아마 이 이야기는 단순히 나 혼자만의 생각이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나는 ‘운동권 내 짝짓기 문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자 한다. ‘정치적이거나 사상적인 이념을 나눌 수 있는 정치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반려자를 찾으려는 일종의 문화.’이다. 운동권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상의 이유로 자신을 이해할 반려자를 일반 사회의 연애 시장에서 찾기 힘든 경향이 있다. 또한 운동권 가스라이팅의 주요 단골 소재인 ‘너의 사상을 이해 못하는 연인은 진정한 연인이 아니며, 너를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우리(운동권)밖에 없다’에 스스로 먹힌 꼴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기존의 연애 시장에서는 소위 ‘교환 가치’가 있는, 외모의 측면에서나 경제적 능력의 측면에서나 어느 정도 가치를 인정받는 사람만이 연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교환 가치’가 없는 운동권 내의 남성들은 기존의 연애 시장에서 탈락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기존의 연애 시장이 아닌 운동권 내에서 자신의 반려자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발생한다 : 정치적 신념으로 조직에 들어와 정치 활동을 하고자 하는 여성이, 운동권 내에서 짝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에 눈에 불을 켜고 여자 후배들에게 치근덕거리는 남성 선배들로부터 끊임없이 구애(를 빙자한 괴롭힘)을 받곤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구애의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조직화’를 빙자하여 이뤄진다는 점이다. 조직의 일원으로 녹아들기 위해서는 조직원들이 서로 친밀감을 쌓아야 하며, 그러므로 자신과도 친밀감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주요 요지이다. 그리고 구애의 결론은 항상 “자신과 뜻이 맞는 동지와 사랑을 하고 싶다”로 귀결된다. 이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이 모든 상황을. 한 마디로 ‘어쩌라고’이다. 그런 이유로 많은 여성들이 운동권을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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