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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정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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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Nov 22. 2022

건강하다는 건 멍청하다는 뜻 아니에요?

정병일기 (1) 내가 정신과를 다니게 된 이유

"아니, 생각을 해 보세요. 세상이 이렇게 못돼처먹은 인간들이 많고, 부조리한 일들이 많은데 이런 세상에서 제정신을 갖고 살아간다는 게 말이 돼요? 이런 세상에서 건강하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혼자서 머릿속으로 행복회로를 돌리면서 자기만 챙기며 살고 있다는 뜻 아니에요?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세상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멍청한 사람일 거에요. 그럼 저는 계속 아플래요. 나는 아픈 건 괜찮아도 멍청해지는 건 싫어요."


위의 말은 정신과에 다니기 전, 내가 누군가에게 했던 말을 각색하여 정리한 것이다. 지금은 위와 같은 생각이 일종의 병증이라는 것을 안다. 세상이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이며 가난하고 나약한 이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지만, 그럼에도 삶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한편으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삶을 살아가면서 점차 알게되었다. 자신을 챙길 줄 아는 것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라는 것도 일련의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아마도 (그릇된 방식으로) 나름대로 아픔을 긍정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나는 아픔을 긍정하는 방법을 잘 몰랐지만,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누군가로부터 구원받는 서사를 굉장히 혐오했었다. 저런 말을 하게 된 배경에는 나의 가족 구성원, 그러니까 엄마로부터 기인한 것이 있다. 엄마는 삶이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종교를 찾았고, 엄마에게 위안을 주는 인물을 찾아서 몇 년을 주기로 종교를 바꿨다. 엄마는 종교를 들락거리며 자신의 삶에 대한 고통을 위로받고자 했으며, 그 고통으로부터 의미를 찾고자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엄마 손에 이끌려 여러 종교를 전전했다. 인디안, 티벳 스님, 미국 스님, 한국 스님, 목사님부터 시작해 신천지까지 들어갈 뻔했다. 나는 그 모든 곳에서 이유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종교에서는 나의 우울과 분노 등 다양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 내 '생각'이 그릇된 탓이라고 여겼고, 근본적 고통의 원인은 결국 나의 '생각'이 문제이며 내 생각을 변화해야 모든 문제(심지어 가난까지)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거의 모든 종교에서 모든 문제의 핵심이자 근원으로 나의 생각을 탓하는 발언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내가 처음 세월호 집회에 갔을 때, 엄마는 나에게 '그런 일'들을 외면하고 사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에게 세상 사람들 다 멀쩡히 잘 살아가는데, 왜 너 혼자 거기서 그렇게 울고불고 화를 내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들이 아픈 건 중요하고 엄마가 힘든 건 생각 안 하냐는 엄마의 다그침은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내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을 내 의지가 나약하고 생각이 편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지 엄마처럼 외면할 수 없었고,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내 행복을 지키느니 기꺼이 누군가의 불행을 마주 보고 싶었다. 그로 인해 내가 아플 수 있다면 차라리 기꺼이 아프고 싶었다. 아마 나는 엄마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건강을 원하는 엄마에게 건강이라는 개념을 후려치는 방식으로 아픔이라는 것을 과도하게 치켜세우고 미화한 것 같다.


그런 내가 정신과에 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하나의 드라마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트위터에서 <빨간머리 앤>이라는 영국 드라마를 추천받게 되었다. 심심했던 차에 드라마를 보던 중 나는 내 안에서 이상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꼈다. 성장드라마인 만큼 작중에서 주인공인 앤은 친구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부탁받은 일을 실수로 망쳐버리는 등의 행동을 자주 보였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주변인들의 반응이었다. 나는 당연히 앤이 꾸중을 듣겠거니 하며 생각했지만, 작중 주변 인물들은 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앤의 실수를 용납하고 용서했다. 그걸 보는 순간, 내 안에서는 미칠 것 같은 질투심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왜 앤의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앤에게 너그러운 거지?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았는데? 나는 항상 잘못을 저지르면 누군가에게 맞고 나에게 실수는 절대 용납되지 않았었는데? 그러니까 나는 ··앤을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왜 드라마를 보며 이렇게까지 화가 치솟고 질투가 나는지, 왜 나는 주인공인 앤을 미워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결과, 이제까지의 나는 실수를 하면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가족들은 나의 실수를 처단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 사람들과 끈질긴 인연의 시간 속에서 암묵적으로 '잘못을 하면 맞아야 한다'는 것을 체득했다. 그렇게 자라온 내가, 실수를 용납받는 하나의 스토리, 고작 한 드라마 주인공을 보고 미칠 것처럼 분노하며 질투하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나는 고작 허구의 인물에게조차 한을 품고 독기를 뿜어내는 내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을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너처럼 그렇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는데, 너는 왜 나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거야?"라고 할 수 있다. 엄마는 나에게 "한을 쳐먹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물론 내 입장에서는 엄마도 "한을 쳐먹은 사람"이었지만),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받지 못한 것을 누군가가 받는 것을 보고 질투와 분노, 시기에 휩싸인 사람이 된 것이다.  


여기서 "한"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먼저 "한"은 "원망"과 억울함"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대한 억울함이고, 이차적으로는 같은 상황에서 타인이 자신보다 좋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억울함과 원망이다. 왜 자신만 이렇게 나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억울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이 지점에서, 그러니까 '한을 먹는' 과정에서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사실 자신이 당한 어떤 부조리한 일을 해석하는 과정은 굉장히 험난하며, 그를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자원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해석할 시간적 여유와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억울함의 양이 많을 때, 즉 부조리한 상황을 너무 많이 마주칠 때, 그 사람은 자신의 분노와 원망, 억울함을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꾸역꾸역, 토해내지도 못한 채 삼켜야만 한다. 문제는 일정 이상의 억울함을 먹게 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풀어낼 언어를 잃게 되어 자신이 당한 부조리에 대하여 설명할 말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언어를 잃은 사람은 그저 타인에게 질투와 원망을 풀어내게 된다는 점이다. 나 또한 그랬고, 그런 내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아마 그때 그대로인 채로 있었다면, 아마 나는 나의 상처를 이유로 타인에게까지 상처를 '죄책감 없이' 주었을 것이다. 이유는 단지 내가 그렇게 당해왔기 때문에.


그리고 앞서 내가 "건강하다는 건 멍청하다는 뜻 아니에요?"라는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빨간 머리 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작중에서 주인공인 앤은 누군가 곤경에 처하거나 자신의 친구가 부조리한 일을 겪을 때, 맞서 싸웠다. 고작 빨간 머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롱을 하고 머리 끄트머리를 잡아당기자, 앤은 분노를 참지 않고 길버트의 머리를 석판으로 내려쳐버린다. 자신의 선생님이 단지 미혼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모함을 받고 마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앤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선생님이 마을에서 계속 수업을 할 수 있도록 친구들과 다 함께 돕는다. 그런 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건강한 사람들은 내 생각과 다르게 부조리함에 순응하거나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는구나', '오히려 누군가를 설득하고 목소리를 내서 그 변화에 동참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 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앤처럼 건강해지지는 못하더라도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분노라는 감정에 휩싸여 고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내 말이 누군가에게 가닿았으면 좋겠다는 갈망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사실은 슬프고 두렵고 무서운데도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무서워 여기 이대로 서 있는 거라는 말을 너무나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분노에 휩싸인 말들은 날카롭고 뜨거워 상처를 주기 십상이었다. 내 상처는 타인에게까지 들불처럼 번져 타인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상처만 남길 뿐이었다.




나는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당시 내 모습으로는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더하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타인의 아픔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먼저 나 자신의 모습부터 마주 보아야 했다. 나는 단지 그걸 혼자 하는 게 너무 두렵고 무서웠고, 그걸 함께 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 역할을 내 가족이나 애인이 하지 못했기 때문에(사실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미뤄둔 정신과를 예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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