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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BAC Aug 26. 2021

삐라와 상처

삐라 아세요?

<삐라와 상처>


귀갓길 도로 위에 전단지가 흩뿌려져 날리고 있었어. 문득, 어릴 적 삐라가 떠올랐어. 우리 동네에는 유난히도 자주 삐라가 날아왔거든. 충청도와 강원도 사이의 우리 동네가 북한에 가까워서 그랬나봐. 아니면, 백두대간을 타고 바람이 내려오기 쉬워서였을지도 몰라. 바로 전날 하교하면서도 못 봤던 삐라가 다음날 아침 등굣길을 나서면 학교 옆 앞산에도 또 뒷산에도 자주 뿌려져 있었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눈이 참 밝잖아? 내 친구들은 한 장도 발견하지 못할때도, 난 마음만 먹으면 잠시 온 산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한 번에 여러 장을 줍기도 했어.


그 삐라를 왜 그렇게 찾아 헤맸냐고? 응, 삐라를 주워서 동네파출소에 갖다주면 아저씨들이 몇 학년 몇 반 이름을 적게 한 후 선물을 줬거든. 너도 알지? 그게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파는,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는 학용품이 아니었거든. <영월경찰서>라고 선명하게 찍힌 로고는 왠지 멋있고 특별해 보였어. 명품을 찾는 사람들의 심리와 비슷하다면 이해하겠니? 그래, 맞아. 우리는 자라면서 간이 조금씩 붓고 단위가 조금 커졌을 뿐이야. 어쩌면 남들이 갖지 않는 특별한 것들을 갖고 싶은 욕구는 인간의 원초적인 심리인지도 몰라 그치?


아무튼 그런 특별한 로고가 찍힌 학용품을 얻기 위해 이 산 저 산을 마구 헤매다가 늦어서 엄마에게 혼나기도 했어. 그래도 뭐 겉으로는 반성하는 척해야만 빨리 종결되는 걸 알았어. ‘다시는 길 위에서 안 헤매고 일찍 올게요.’ 하면서도 여러 장의 삐라를 손에 쥐었다는 만족감에 ‘야호!’를 맘 속에선 외치기도 했어. 엄마가 부엌으로 가면 나는 숙제한다며 내 방으로 가는 척하다가 뒷문으로 살짝 빠져나와 그 길로 쏜살같이 파출소로 달려갔어.


제복을 입은 파출소 아저씨는 참 멋있어 보였는데, 생각보다 되게 치사하다? 원래는 삐라 한 장에 자 하나, 혹은 연필 한 자루를 주는 거야. 여러 장을 주워가면 가끔 연필이 많이 들어가는 자석필통을 주기도 했어. 그런데 말야, 내가 워낙 자주 삐라를 주워가니까 나한테 주는 선물이 아까웠나봐. 어느 날은 삐라 석 장을 주웠는데, 자 세 개를 줘야 하는데, 아저씨가 연필 두 자루를 주겠다고 하는 거야. 너무하지 않니? 나는 기껏 땟국물인지 땀인지도 모르게 마구 뒤섞인 짠 내 나는 땀방울을 훔쳐가며, 게다가 엄마한테 혼나면서까지도 주워왔는데 말야.


연필은 나도 많으니까 무조건 자를 달라고 했어. 그것도 세 개. 맞잖아? 삐라 석 장이면 자 세 개를 줘야지 맞지. 그런데 아저씨가 그걸 못 주겠다고 하는 거야. 정말 치사하지? 그래서 나는 아저씨에게 그럼 내 삐라 다시 돌려달라고 했어. 나중에 더 좋은 파출소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자랑 바꿔 오겠노라고 말야. 그 날의 네고는 최종적으로 아저씨와 내가 조금씩 양보해서 삐라 석 장에 자 두 개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했어.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했거든. 아버지는 언제나 칼퇴근하셔서 다섯 시 삼십 오 분이면 대문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셨거든. 엄마와는 달리 아버지는 남동생보다 나를 더 좋아하셨거든. 나는 우리 집에서 우리 아버지는 내 편이라고 어릴 적부터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러면서도 매일 아버지랑 싸운 나쁜 딸이기도 했어.


아무튼 반질반질한 새 자를 받아 가지고 오면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날 아침 담임선생님이 친구들 앞에서 내 이름을 불러줘. 삐라를 주워온 착한 아이라고. 그리고 또 그게 끝이 아니야. 운동장에서 하는 전교생조회 때 삐라를 가장 많이 주워온 학생들에게 선물포장지로 싼 공책과 연필을 세트로 묶은 상도 줬어. 물론, 나는 가끔 교단에 불려나가 그 상을 받았지. 공책에는 나뭇잎 모양의 동그란 테를 두른 한가운데 <상>이라는 글자가 있는 남색의 도장이 꽝 찍혀 있었고, 나는 그 문구가 좋았어. 상은 원래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별함이 있잖아. 경찰서 로고가 박힌 자와 ‘상’ 자가 새겨진 공책, 그리고 연필. 몇 장의 삐라로 이렇게 여러 번 상을 받는 거, 되게 기분좋은 일 아냐? 마치 적금 같잖아 그치?


그런데 말이야. 그 시절에는 좋았던 그 상과 팔뚝에 찼던 노란색 주번 완장. 그런 시절을 보낸 우리가 좀 짠하지 않니? 남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치열함을 배웠구나 싶어. 그냥 짠해 그치?


오늘은 산책길에서 그런 어린 시절을 생각하다가 열 살 아이처럼 냅다 바닥에 얼굴을 갈았지 뭐야. 손가락은 찢어지고 양 무릎은 피가 나고 허리는 충격으로 걷지를 못하겠고, 그야말로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어. 태어나서 두 번째로 심하게 넘어져 본 날이야. 그런데 여기저기 아픈데 마음은 후련해. 왜냐고? 나는 내 몸에 상처를 내고 싶었나봐. 그냥 후련해. 가끔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듯 몸도 이렇게 상처를 내면 후련해진다는 걸 처음 알았어. 골골 아파하는 동안 답답했던 내 가슴도 같이 치유가 되길 바래.


진통제를 벌써 두 번째나 먹었어. 밤이 되니까 여기저기 더 쑤시고 아팠거든. 그런데 오늘은 독한 진통제를 맹물로 마시고 싶지가 않았어. 아주 달달하고 시원한 수박주스에 약을 털어넣고 휘휘 숟가락으로 저어서 마셨어. 이제 좀 기분이 나아졌어. 뭐 괜찮아 여전히 살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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