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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BAC Aug 26. 2021

나름 괜찮아

괜찮은 나이 오십

<나름 괜찮아>


오랫동안 앉아서 작업하고 나면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그래서, 오늘은 일찌감치 침이나 맞으러 한의원에나 가야지 하고 아침을 시작했어. 그런데 밖에 나가보니 이제 막 익은 버찌들이 빨갛고 까맣게 하얀색의 내 차 위에 떨어져 있었지 뭐야. 겨우내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온동네의 참새들이 신이 났던 모양이야. 차 지붕위에는 새들이 발라먹고 퉤! 하고 뱉어놓은 버찌 씨앗들이 마치 날밤을 새어 축제를 벌인 모습처럼 너무나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던 거야. 축제한 다음날의 난장판 알지? 바로 그런 모습이었어.


좀 어이없었어. 이것들이 남의 차 위에서 도대체 무슨 일들을 벌인 거야. 하지만, 어쩌겠어. 그 녀석들을 혼내줄 수도 없어. 혼내려면 아마도 1년은 더 걸릴지도 몰라. 그 녀석들 모두 나보다 날쌜 테고, 그 날쌘 녀석들을 쫒기에 나는 좀 피곤하거든. 녀석들을 혼내기보다 차라리 쿨하게 용서해주고 내 차를 닦아야지. 시간절약, 정신건강, 경제성 등 모든 것들을 계산기로 두드려 봐도 그게 훨씬 더 이익이거든. 이래봬도 난 그런 계산 정도는 빠른 오십대거든. 너네 엄마 아부지도 축제때는 슬쩍 눈 감아 줬을거야.


녀석들을 야단치지 않고 쿨하게 용서해주기로 하고 차를 닦았어. 잠시 세차하러 갈까도 생각해봤어. 그런데 내가 가는 세차장은 북악터널을 지나 정릉 근처까지 한참 가서 다시 유턴을 해야 돼. 또 모르지, 지난번처럼 세차하러 몰려온 차들이 즐비하게 길가까지 줄을 서있을지도. 그래, 세차장대신 고양이세수라도 시키자. 당장 축제의 난장판이라도 지우려고 차를 닦았어. 뭐, 나름 괜찮았어. 금새 하예졌거든.


그 사이, 병원 가는 걸 잊어버렸어. 세차하는 동안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나봐. 어쩌면 세차하느라 통증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어. 또는, 동시에 두 가지를 생각하기 어려운 나이가 된 것인지도 몰라. 그래도 뭐, 나름 괜찮았어. 차도 깨끗해졌고, 또 기분도 좋아졌거든, 이제는 통증보다 배고픈 고통이 더 급해졌거든.


뭘 먹을까? 아침에 밥 먹으러 오라는 선생님들이 밥상차린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주셨어. 달려가고 싶었어. 그런데 안 간다고 해놓고 또 가는 건 좀 변덕스럽잖아. 그럼 누구랑 밥을 먹을까. 지난번 칼국수를 맛있게 함께 먹은 희숙 선생님을 잠깐 생각했지. 희영 선생님의 병원 결과는 아직 1주일이나 더 있어야하니 오늘은 쉬게하자. 암튼 희숙 선생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연결이 되도록 해 놓은 후 집으로 들어왔어.


테이블 위에 토마토가 놓여있는 거야. 그 옆에는 양배추가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었어. 아무래도 이제 먹기는 힘든 상태야. 양배추에 농약이 많으니 물에 담갔다가 사용하라는 이야기에 글쎄 물에 푹 담근 채 이틀이 되어서야 건진 거야. 사실 이틀 내내는 아니었고, 몇 번을 담갔다 뺐다 반복했어. 그 사이 몇 번을 해 먹어야지 생각은 했지만 집에서 밥 먹을 일이 생기지가 않았거든. 컬리에서 한 주먹에 5천 원 하는 썰어놓은 양배추가 너무 비싸다는 생각에 양배추 한 통을 샀다가 이렇게 되어버린거야. 게다가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버려야 하니, 그냥 조금 더 말려서 버릴까 해.ㅋ


그 사이 배가 너무 고파졌어. 이제 1시가 다 되었거든. 아침 내내 뭐가 그리 바빴는지, 오늘은 커피 한 잔도 못 마셨거든.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열었다가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졌어. 레스토랑을 가는 것보다 빠르고 수애뇨에 오늘 점심 뭐 해줄 거냐고 묻기도 귀찮았거든.


스파게티 면을 꺼내니 조그마한 두 덩이밖에 남아있지 않은 거야. 배가 너무 고파서 양이 모자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괜찮아, 좀 섞으면 어때. 두 덩이의 시금치 스파게티면과 길죽한 스파게티면을 한꺼번에 넣어서 삶았지. 좀 섞이면 어때. 뭐 나름 괜찮았어. 스파게티 소스를 뭘로 할까 생각하다가 밖에 나가 잔뜩 있는 바질 이파리를 몇 장 따왔지.


그 사이 면은 익어가고 있었고, 나는 바빠졌어. 일단 마늘 썰어놓은 것이 있으니 무조건 마늘부터 볶자. 마늘과 올리브오일을 넣고 볶기 시작했어. 냉동고를 열어보니 새우도 있는 거야. 그래, 때려넣자 아무거나. 난 지금 배가 몹시 고프거든. 아, 참 ! 야채가 있어야지. 냉동고에 썰어놓은 버섯을 한주먹 넣었어.


그 사이 면은 다 익었고, 이제 불을 꺼야 해. 급하게 소스를 찾으니 스파게티소스를 뭘로 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한 거야.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팟타이소스였어. 뭐 어때. 나름 괜찮을거야. 스파게티를 하려다가 팟타이를 해버리게 생겼어. 그러고보니 새우도 있고. 팟타이 하려고 냉동에 넣어 둔 부추가 생각났어. 그래, 이왕 스파게티 팟타이가 된 거 부추도 넣자. 그렇게 해서 부추까지 넣은 완벽한 스파게티 팟타이가 된 거야.


다 되어 불을 끄고 맛을 보니, 이런, 소스가 모자랐나봐. 많이 싱거운 거야. 어쩌지? 그래,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소스를 넣으면 되지 뭐. 냉장고 깊숙이 봤더니 달래 선생님이 담가준 올리브가 눈에 띄는 거야. 아싸! 하고 올리브를 꺼냈어. 그리고 또 깊이 봤더니 토마토소스가 있는 거야. 팟타이소스와 토마토소스를 합치면 어떤 맛이 날까? 잠시 망설였지만, 뭐 괜찮아 나름 괜찮을거야. 그렇게 해서 토마토소스를 조금 뿌렸어. 비주얼은 완벽한 팟타이 스파게티인데, 맛? 맛은 팟타이 토마토 스파게티가 되었어.


나름 괜찮은 나이 오십이야. 안 괜찮은데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되고, 예쁜 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 너무 완벽한 몸매보다는 조금 여유있는 몸매가 매력적인 나이. 굳이 날씬해 보이려 꽉 조이는 코르셋을 입지 않아도 되는 나이. 사투리가 나올까봐 조심조심 이야기하던 이십대도 모두 지나, 되레 툭툭 사투리가 나오는 게 훨씬 더 멋있는 나이. 남들이 뭐라 하든 너무 신경쓰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나, 완벽하게 내가 되어가는 중인 나이.


나름 괜찮은 오십대가 나름 괜찮은 국적불명의 음식을 만들어 늦은 점심을 먹는다. 시간은 두 시를 향하고 정체 불분명한 스파게티는 불었다. 그래도 나름 괜찮다. 나름 괜찮은 오십대가 늦은 오후 베란다에 앉아 여유롭게 음악을 들으며 식사를 한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이맘때, 저 멀리 산이 건너다보이는 내 집이 여름엔 더 추운 카페보다는 훨씬 편한 나이. 나름 괜찮은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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