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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BAC Sep 28. 2021

엄마와 나

핑크뮬리의 계절.



팔십대의 부모님이 사시는 친정에 가면 집안전체에 진한 인공 향내가 풍긴다. 도시의 우리 집에는 무향 무취가 건강에 좋다고 하여 되레 베란다의 작은 꽃밭에서 집안으로 전해오는 은은한 꽃향기밖에 없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유달리 깔끔한 성격이었다. 눈이 오면 새벽부터 ‘기상’을 외치며 우리들을 깨워 동네의 눈을 모두 치우게 했고, 아버지의 125CC 오토바이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똑같이 반짝반짝 깨끗하게 윤이 났다. ‘3330’ 번호판이 달린 아버지의 첫 자동차 또한 언제나 처음 살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나를 포함한 온 가족이 전화번호도 그와 비슷한 번호에 비밀번호까지 3330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각자 사용하였으니, 차가 드물던 그 시절 그만큼 우리는 뿌듯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첫 자동차 3330은 반짝반짝 예쁜 모습으로 우리 가족에게 다가왔다가, 언젠가 흠집 하나 난 곳 없이 처음과 똑같이 반짝이는 모습으로 스르르 예쁘게 사라졌다. 그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깔끔한 성격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꼼꼼한 성격이기도 했다. 우리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도 “안방 장식장의 서랍 중에 위에서 두 번째 칸을 열면 상자가 세 개 있는데, 가운데 상자를 열면 손톱깎이가 있어. 그 중 두 번째 줄 첫 번째에 꽂혀있는 손톱깎이를 가져오너라.” 이런 식으로 디테일하게 심부름을 시킬 정도였다. 저녁이 되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꼭 손전등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 앞문과 뒷문, 그리고 집안의 모든 문들을 한 번씩 점검하였다. 마지막으로 거실에 들어올 때에는 언제나 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모두 가지런히 정리했고, 그러고 나서야 침실로 들어갔다.

깔끔하고도 꼼꼼한 아버지는 완벽주의에 가까웠고, 나는 그런 아버지의 성격이 좋았다. 요즘은 당신의 몸에서 나는 노인 냄새를 혹시나 자식들이 싫어할까봐 몇 분 간격으로 칙칙 인공향을 뿜어내는 기기까지 설치하였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마음 한편이 저려온다. 나야 우리 아버지의 자식이지만 자식들은 그래도 나이를 먹어가며 봐도 못 본척 할 수도 있지만, 손자, 손녀처럼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솔직한 말이나 느낌들조차도 아버지는 신경을 쓰고 계시는 것이다. 나도 아버지 나이가 되면 지금의 우리 아버지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자식들 눈치를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집에는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고 꼼꼼한 아버지와 털털하지만 사실은 털털한 척을 해야만 살아지는 예민한 엄마가 함께 사신다.  


엄마가 하는 일들은 아버지의 일보다 훨씬 더 많았지만, 별로 표시가 나지 않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엄마는 지금도 직접 장을 담그고, 배추도 굳이 앞산 텃밭을 오르내리며 씨앗도 뿌리고 길러서 손수 김치를 담그고, 그렇게 장만한 장과 김치를 딸네집 아들네집에 골고루 보내준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것이다. 엄마는 그처럼 일상에 묻혀 흔적도 없이 지나가버리는 일들을 하느라 하루 종일 바쁘다가 저녁이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낮 동안 학교에서 직장에서 각자의 바깥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가족들은 엄마가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 알 리 없었다. 우리는 엄마의 끙끙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제발, 일하지 말고 끙끙 소리 좀 내지 말라며, 타박을 했다.


우리 자식들이 다 자라서 돈벌이를 할 무렵, 언니들이 월급을 탔다며 사오는 물건들을 보면 아버지는 언제나 행복하게 웃으며 좋아했고, 엄마는 얼굴을 찌푸리며 ‘별 쓸모없는 물건을 돈 아깝게, 이런 걸 사느냐’는 타박부터 시작했다. 뒤이어 고생해서 번 돈을 헤프게 쓰면 어떡하냐, 돈을 그렇게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등의 잔소리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당연한 결과로 자식들은 엄마의 선물을 살 때면 언제나 인상을 쓰던 얼굴이 떠올라 점점 주저하게 됐고, 시간이 갈수록 엄마 선물 챙기기와는 자연스레 멀어져갔다. 그것은 물건 살 때만이 아니었다. 하도 끙끙거리면 무릎이나 어깨라도 조금 주물러드리는데, 몇 분을 못 참고 이제 다 나았으니 됐다며 그만 쉬라고 한다. 당신의 종아리가 아픈 것보다 자식들의 손이 아플까를 그 와중에도 자식들의 손을 걱정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여러 명의 자식 중에 유달리 나는 어릴 때부터 반항적이었다. 언제나 남동생만 예뻐하는 할머니의 편협한 자식(손주) 사랑이 내가 아는 사랑의 첫 기억이었으므로, 사랑에 관한 관념이 좋게 쌓일 리 없었다. ‘나는 왜 남자가 아니라 여자로 태어났는가?’라는 자기존재에 관한 원초적인 의문과 부정이 어쩌면 유소년기의 나를 반항적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의 눈에는 맨날 허드렛일을 하고 사람대접도 못 받는 것 같은 엄마의 모습이 더 싫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 같은 여자는 절대로 되지 말아야지, 라고 은연중 그렇게 주문을 외웠나보다.


아버지는 유럽이든 일본이든 어느 나라에 가서도 그곳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전혀 시골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 멋쟁이다. 그런데 낯선 외국음식도 그렇게 잘 드시다가 이상하게도 집에만 돌아오시면 음식타박을 한다. 나는 아버지가 아침에 나온 음식을 저녁에 똑같이 드시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엄마를 자신의 아내라기보다는 하인 내지는 몸종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부터 내내 엄마에게 타박하거나 소리지르는 모습을 봐왔으니, 우리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엄마를 무시하고 ‘엄마는 그것도 몰라’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뱉었던 것 같다.


가장 힘들었을 엄마의 나이 오십과,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 같은 내 나이 오십이 겹치며 지나간다. 아버지가 아프면 온 집안이 난리가 나고 서울에서도 가장 유명한 병원을 알아보고 그리로 모셔오지만, 엄마가 아프면 어디가 아픈지 무슨 약을 드시는지는 잘 모른다.


지난 3월, 몇 달만에 시골의 친정집을 다녀왔을 때 난생처음으로 엄마의 다리를 주물러드렸다. 엄마는 가만히 누워서 안마 받는 것 자체를 어색해했다. 나는 조금 피곤하다 싶으면 서울의 유명한 마사지숍에 가서 내 몸을 맡긴 채 편안히 누워있는 게 익숙한데 말이다. 쉰이 된 딸이 여든을 넘긴 엄마의 다리를 주무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양쪽 다리가 똑같지 않고 한쪽 다리가 퉁퉁 부어올라 있었던 것이다. 다리가 저려도 저리다고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엄마는, 그렇게 두 다리로 편안히 걷지도 못하고 한쪽 다리는 절면서도 쥐가 나서 그렇다고 대충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도 나처럼 젊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철모르는 나이에 시집와서 아들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어머니에게 구박받은 우리 엄마.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밥도 굶기고 곳간열쇠도 뺏어버렸다는 엄마의 시집살이 이야기. 그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나 있을 일만 같았지, 우리 엄마가 실제로 겪었다기에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80대인 엄마가 20대 시절에 겪은 이야기였을 터이니, 아무리 숫자를 더한다고 하여도 불과 60년밖에 안 된 시절의 일이다. 최빈국에서 선진국까지를 한 사람의 생애에 경험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로 우리는 세월을 숨차게도 달려왔나 보다.


세상이 바뀐 지가 언젠데 여전히 엄마는 그 시절을 생각해서인지 양말 한 짝도 성한 것 신기를 어색해한다. 서울에 사는 며느리와 딸들이 사다드린 꽤 괜찮은 고급양말들이 엄마의 서랍에 한 가득인데도 그렇다. 그 양말들은 그럼 또 어떻게 쓰냐? 가끔 딸들 중 누가 집안행사가 아닌 다른 날에 혼자 오거나 하면 뒤적뒤적 서랍에서 제일 좋은 양말을 꺼내기도 하고 꽤 괜찮은 옷도 꺼낸다. “××가 사다줬는데 나한테는 안 어울려. 그리고 난 양말이 너무 많아.” 하면서 기어이 며느리한테 몇 개, 딸들한테 몇 개 굳이 나누어준다. 싫다고 해도 기어이 “나는 시골에서 별로 입을 일이 없다”고 한다.


엄마의 옷은 철마다 딱 필요한 몇 가지 외에는 별로 없는데 비해, 아버지의 옷은 옷장 한 가득을 채우고도 모자랄 정도이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부터 물건에 대해 관심도 많고 욕심도 많았다. 새로 나온 신기한 것들이 있으면 모조리 사야만 직성이 풀렸고, 옷도 본인이 멋지다 생각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사야만 했다. 풍채가 번드르르해서 시내를 나가도 전혀 시골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고, 돈쓰는 것도 아주 잘했다. 반대로 엄마는 시골아줌마처럼 촌스러웠고 물건을 살 때도 깎아달라고 했으므로, 그 모습이 싫어서 같이 다니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멋진 구두와 양복의 아버지는 저만치 앞서가고 죄인처럼 그 뒤를 졸졸 아이들의 손을 잡고 쫒아가는 촌스런 아낙네가 어디 우리 엄마 혼자였으랴.


그런 엄마의 모습이 그 시절 우리나라 여성들이 처한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는 생각이, 같은 여성으로서 내 가슴을 또 한 번 찌른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결혼이란 ‘시집’이라는 단어가 지닌 뜻(시부모가 사는 집, 또는 남편의 집)이 시사하듯, 남의 집 사람이 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기쁘거나 행복한 일이 아니라, 눈물이 앞을 가리며 슬프게 남의 집으로 보내지는 과정이었다. 우리 어머니 세대의 경우는 그렇게 남의 집 사람이 되어 하녀처럼 평생 손발이 닳도록 시중을 드는 동안에 세월이 바뀌어버렸다. 세상이 개벽할 만큼 바뀐 줄도 모르고 아주 오래전과 똑같이 미련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이란 참 눈물겹고 눈물겹다.


엄마에 대해 갖는 나의 감정은 참으로 복잡하다. 짜증나고, 짠하고, 슬프고, 불쌍하고, 화가 나다가 왈칵 눈물이 나온다. 바보처럼 맨날 당해도 소리 한 번 시원하게 지르지 못하고 부엌에서 혼자 뒤돌아 소리죽여 눈물 훔치던 엄마에게서 느껴지던 화를 시작으로, 남들은 다 하는 치장도 않는 허름한 엄마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다가, 선물이라고 옷이라도 사다드리면 기분좋다는 말보다 아껴써야 한다는 잔소리부터 하는 엄마에게 짜증이 났다. 짜증나고 짠하고 슬프고 불쌍하다가 화도 났다가 왈칵 끝내 눈물이 나는 엄마의 모습을, 내가 평생 몰랐을까? 몰랐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알아도 못 본 체 몰라도 못 본 체해야만 차라리 내 맘이 편해지니까 모른 체했다는 게 정답인지도 모른다.


“엄마, 우리가 뭘 사주면 그냥 기분좋다고 받고, 용돈 드리면 기분좋게 받아. 엄마가 안 받는다고 그 돈이 엄마가 원하는 대로 쓰일 것 같아? 엄마가 안 받아도 그 돈은 그렇게 나가. 그게 돈이야.” 그랬더니 엄마는 그런다. “그럼 그렇게 기분좋게 쓰면 되지 뭘. 평생 이렇게 살아 온 내가 그 돈을 받는다고, 그 옷들을 입는다고 내 인생이 뭐가 달라져? 익숙한 대로 살면 되는 거지.”


엄마는 억울하지도 않나보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면 남은여생 행복하게 살고 싶을 만도 한데 말이다. “엄마는 억울하지도 않아, 이렇게 살아 온 세월이?” “아니, 니들만 잘 살면 되는 거지 뭐.”


전생이 있다면 나는 어떤 인연의 끈으로 엄마와 딸의 연으로 만나게 된 것일까? 엄마는 자식에게 평생 그렇게 모든 걸 다 주고도 또 주다가 소리 없이 가버리면 어떡하나? 오십이 되어 이런 불쌍한 우리 엄마가 어느 날 사라지면 어떡하나 덜컥 겁이 났다.


엄마는 내가 서울로 올라오기 전날부터 분주했다. 봄이라 엄마가 가꾸는 산에 흰민들레 싹이 파릇파릇 돋아났는데, 그걸 모두 직접 뜯고 다듬고 여러 번 깨끗하게 헹궜다. 그러고도 민들레의 쓴 맛을 빼야 한다며 밤새 물에 담가두고 중간중간 가서 뒤집으며 물을 다시 바꾸는 일을 했다. 평소 딸에게 잘 대해주시는 이웃들에게 뭐라도 챙겨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서울에서는 구할 수 없는 봄에만 맛볼 수 있는 흰민들레 김치와 쑥버무리 같은 시골음식들을 챙겨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평소에 살갑게 말을 하지 못하는 나는 “아, 엄마. 잠 좀 자. 엄마가 왔다갔다하니까 나도 깨잖아.” 그렇게 퉁퉁거렸다. 그러면 엄마가 그냥 옆에서 잠들게 될 줄 알았는데, 다음 날 엄마는 갑자기 더워서 못 자겠다며 거실로 나가서 자겠다고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릴 때부터 퉁퉁거리지 않고 살갑게 대하는 연습이라도 해둘걸. 말도 예쁘게 할 줄 모르고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할 줄도 해본 적도 없는 퉁퉁이 딸인 나 자신을 책망했다. 아버지한테 해드리던 안마의 10분의 1만큼이라도 엄마에게도 해드렸더라면, 아버지에게 했던 살가운 말투와 애교를 엄마에게도 단 몇 번이라도 했더라면,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이 오십이 되니 너무 잘 보이는 엄마의 행동으로 마음은 너무 아프지만 새삼스럽게 표현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자꾸 나는 친정나들이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비와 함께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엄마가 나에게 했던 소리없는 희생이 더 정확히 보일수록 마음이 너무 아파오는 오십이다. 다음 세상에는 제발 우리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 마음 조금이라도 갚아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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