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와 아빠의 재회
오전쯤이었을 것이다. 중고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고 있는데, 웬일로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에 아빠는 손주인 준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거나 얼굴을 보고 싶을 때 말고는 나에게 먼저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마도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있었던 부침으로 인해 서로가 껄끄러워서였을 것이다.
엄마가 수술을 받고 난 뒤, 나는 동생과는 연락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아빠에겐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 동생이 알아서 상황을 잘 전달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엄마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차 정신이 없었다. 굳이 먼저 면회를 가자고 제안하지도 않았다. 아빠가 엄마를 보러 가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고혈압으로 약을 먹고 있었음에도 혈압이 오르고, 대동맥에 박리가 생긴 건 5할 정도쯤 아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아빠와 관련된 문제로 불만이 많았고 매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엄마가 그 모든 불만을 나에게 와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아빠에게 질려 가고 있었다. 더불어그 이야기를 전하는 엄마에게도 질린 상태였다. 그래서 바쁘다는 핑계로 나는 추석 연휴 때도 아빠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발신인이 아빠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전화를 받는 게 조금 망설여졌다. 추석 때도 내내 조용하던 양반이 왜 갑자기 전화를 하셨을까? 혹시 추석 때 연락 한 번 없었다고 서운하다 말하려는 건가? 하나밖에 없는 손주가 보고 싶은데, 영상 통화 한 번 없이 방문도 하지 않은 나를 원망하려는 건가? 지은 죄가 있어 전화를 받는 것이 껄끄러웠지만, 역시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마냥 피하지는 못했다.
아빠의 첫 마디는 임플란트로 시작했다. 임플란트를 하기 위해 치아에 무언가를 심었고 그로 인한 치과 치료를 하러 자주 병원을 가야 했다는 이야기였다. 아, 치과 치료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구나! 전화를 받는 내 자세가 조금 삐딱해졌다. 그러나 이야기는 방향을 틀어, 이제 한동안은 치과를 갈 필요가 없어 여유가 생겼다는 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추석 연휴 이야기로 빠졌다. 아, 역시 내가 추석 때 방문하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었구나. 그러나 아빠는 내가 전화를 해도 받을 수 없었을 거라며, 추석 내내 일을 하느라 바빴다는 말을 했다. 그럼 대체 뭔가, 나에게 전화를 건 용건이?
삐딱하게 서서 전화를 받는 내게 아빠가 어렵사리 한 이야기는 오늘 엄마를 보러 병원에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아빠는 임플란트와 치과 이야기, 그리고 추석 연휴까지 돌아 돌아 온 것이다. 나 오늘 늬 엄마 좀 보러 가고 싶다! 이 한 마디면 될 것을. 자식에게 아내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게 쑥스럽게 느껴졌던 것일까? 아빠는 오늘 내가 병원에 가면 그 길에 같이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애써 덤덤한 듯 하면서도 머쓱하게 느껴지는 그 말투를 듣고 있자니 온갖 상상으로 아빠의 의도를 의심했던 내가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엄마가 입원한 재활 병원은 면회 시간이 정해져 있다. 저녁 여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 두 시간 동안만 가능하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시간에 일을 해야 했다. 내가 일 때문에 같이 갈 수 없다고 말하자 전화기 너머로 난감한 숨소리가 들렸다. 아빠에게 병원 주소만 알려줄까도 싶었지만, 길치인 아빠가 잘 찾아갈 수 있을지 염려가 됐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동생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동생은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시간이 빠듯한 상황인데 굳이 먼 길을 오게 하자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섯 시가 가까워지자 아빠와 엄마가 잘 만나고 있을지 걱정이 됐다. 엄마가 아빠 얼굴을 보고 또 혈압이 오르는 건 아닌지. 잘 걷던 엄마가 쓰러지지는 않을지. 온갖 상상을 하면서도 나는 나가기 전 아이에게 밥을 차려주느라 손과 마음이 바빴다. 부디 동생이 가운데에서 중재를 잘 해 주길 바라면서 수업을 들어갔다. 잠깐 잠깐 수업을 하면서도 마음이 쓰였지만 눈 앞에 닥친 일들을 하는 동안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수업이 끝난 후 휴대폰엔 동생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바로 전화를 걸자, 전화기 너머로 사람들의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면회를 마친 동생이 아빠에게 고기를 사 주기 위해 식당에 들어왔다고 했다. 동생의 목소리는 제법 밝았다.
“어땠어? 잘 만났어? 별 일 없었어?”
“엄마가 워커 끌고 나오다가 아빠 보자마자 울음이 빵 터졌어.”
면회를 하기 위해선 환자가 휴게실이 있는 곳까지 나와야 한다. 병실과 휴게실까지 이어진 긴 복도에는 간호사들과 요양사들이 와글 와글 몰려 있다. 그 한복판에서 엄마는 워커에 의지한 채 엉엉 울고 만 것이다.
“엄마가 너무 한참을 우니까 아빠가 가서 달래주는데도 그치질 않더라구. 아빠도 ‘왜 울어, 이 사람아’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더라.”
엄마와 아빠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했고, 같이 있고 싶으니 결혼을 했겠지. 하지만 살면서 애정보다 더 빠르게 사라진 감정은 서로에 대한 측은지심이었다. 상대가 아파하거나 힘들어해도 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억울한 사람은 본인이라고 강조할 뿐이었다. 아파서 저도 모르게 나오는 신음소리에도 서로는 짜증을 냈다. 상대를 만나 인생이 망가진 쪽은 언제나 자기였다.
그래서였을까. 얼굴을 마주한 엄마 아빠의 모습을 상상하니 어쩐지 어색했다. 더군다나 울고 있는 엄마라니. 그 어깨를 감싼 아빠라니. 나는 마치 드라마 속 한 장면을 볼 때마냥 한 걸음 떨어져 나와 지분지분 젖은 아빠의 쳐진 눈꺼풀을 상상했다. 그 품에 폭 안겨 있는 엄마의 작은 몸도. 내가 알던 엄마 아빠의 모습은 아니지만 제법, 보기에 좋았다.
언젠가 입원 중이던 엄마는 아빠에게 밥을 차려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나에게 아빠랑 밥이라도 같이 먹어주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조금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막상 엄마는 늘 아빠 밥을 차려주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가 아빠랑 싸울 때마다 무기처럼 내밀었던 것은 바로 밥을 차려주지 않는 거였다.
“으유, 아주 식충이야 식충이! 그저 집에 돈이 있든 없든 지 입에 들어가는 것만 해결하면 다 나 몰라라야.”
상대가 밥 먹는 게 꼴보기 싫어지면 헤어질 때가 된 거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엄마는 애저녁에 아빠랑 헤어져야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을 내뱉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또 습관처럼 아빠의 밥을 짓고, 아빠가 좋아하는 경상도식 콩나물국을 끓이고 있었다. 난 그 지긋지긋한 반복에 진저리를 쳤다. 밥을 해 주면서도 나에게 아빠 흉을 보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엄마가 아빠의 끼니를 걱정했을 때도 이렇게 말했었다.
“편하고 좋지 뭐. 엄마도 이제 신경 꺼. 엄마 몸부터 챙겨야지.”
그러나 엄마는 막상 밥을 차려주지 못하게 되었을 때 편하고 좋지도 않았고, 신경을 끄지도 못했다. 삼 시 세 끼 아빠의 밥을 차려주는 일. 그건 어쩌면 엄마가 가장 벗어나고 싶은 일인 동시에 엄마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아빠에 대한 애정도 조금은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빠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온 것처럼, 엄마는 밥을 하고 청소를 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시위하듯 그 ‘일’을 놓으면서도 이내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늬 아빠는 택시 운전 하는 게 아주 유세야. 집에만 들어오면 모든 일에 손 딱 놓고, 내가 이렇게 관절이 아파서 힘든데도 청소기 한 번을 안 돌려 줘.”
아빠는 엄마가 없는 동안 매일 아침마다 청소기를 돌리고, 자기가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면서 엄마를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이 집에 들어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는 동안, 묵묵히 그 일을 하고 어느 새 뚝딱 김이 폴폴 나는 밥상을 놔주던 엄마가 생각났을 것이다. 으유 저 인간! 이라고 궁시렁거리던 엄마의 목소리마저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이건 단순히 집안의 소소한 일을 해줄 사람이 없어 느끼는 허전함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곁에 없는 자신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을 것이다. 형제마저 자신을 외면하고 등을 돌렸을 때, 유일하게 자신의 편에서 함께 그 시간을 견뎌준 것이 엄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느이 엄마 옆에 꼬옥 붙어 있을 거야.”
아빠가 이 말을 자주 했던 걸 보면 이미 아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마다 엄마는 어유 지겨워, 하면서 진저리를 쳤지만 내심 그 말에 기대어 안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서로의 옆에 있을 이유를 찾고, 싫증이 나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다시 또 다가앉게 되는 것이 부부인 건가. 서로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소에 다정한 말 한 마디를 건네지 못하는 게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인 것일까.
동생 말에 의하면 엄마와 아빠는 면회를 하는 내내 손을 잡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자다가 우연히 아빠의 손끝만 닿아도 소름이 돋는다고 했는데. 지난 시간 병원 침대에 홀로 누워 차가운 이불 끝이 닿을 때마다 엄마는 아빠가 생각났을까. 거친 살결일망정 몸에 닿지 않아, 자다가도 그 허전함에 눈을 떴을까.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동안 나와 동생이 그토록 병원을 자주 찾아가고, 이모와 삼촌을 비롯해 친구들이 방문했을 때도 의연한 모습이던 엄마가 아빠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는 것에서 생각이 많아진다. 웬수처럼 서로 으르렁대기 바빴어도 44년 간 함께 했던 사이에게만 내보일 수 있는 가장 약하고 보드라운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꾹꾹 감춰왔던 외로움과 두려움, 막막함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이. 눈 앞에 있으면 속 터지고 울화통이 치밀더라도 안 보이면 그립고 허전하고 염려가 되는 사이. 그게 부부이고 가족이라는 건가 보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어쩌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문득, 어젯밤에 투닥거렸던 남편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밥은 먹었는지, 저릿하던 다리는 좀 괜찮아졌는지 묻고 싶어졌다. 전화를 받자마자 심드렁하게 “왜?”라고 말하더라도 오늘은 서운하지 않을 것 같다.
- 23년 10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