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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응석 Dec 26. 2023

서사의 위기

한병철(2023)

한병철 저(2023), 최지수 역(2023), 서사의 위기, 다산초당


p7 역자 서문

정보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음 스토리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반면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자체다. 


p15

정보와 달리 지식은 그 순간을 넘어서 앞으로 다가올 것과도 연결되는 시간적 폭이 있다.

그래서 지식은 이야기로 가득하다. 지식 안에는 서사적 진폭이 내재해 있다. 


p16

벤야민 "기록이란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근접성이 발현한 현상이며, 

아우라란 아무리 가가이 있어도 원격성이 발현한 현상이다."

아우라는 서사적이다. 아우라는 먼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반면 정보는 원격성을 버림으로써 세계를 탈아우라화하고 탈신비화한다. 

정보는 단지 세상을 앞에 전시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손에 잡히도록 한다. 

#

기록과 아우라, 정보와 서사를 원근법을 통한 그 상세성의 차이로 설명한다.

모호한 지각이 주는 공간에 주관/해석/상상의 개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p17

설명과 이야기는 상호 배타적이다. 

p18

벤야민은 이집트 왕이 어째서 하인을 보고서야 비로소 슬피 울었는지를 설명해 내고자 시도한다면, 

그건 곧 서사적 긴장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설명을 삼가는 것은 진정한 이야기하기의 필수 조건이다. 서사는 설명을 자제한다. 


p22

지루함을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의 과잉활동성 안에서 우리는 결코 깊은 정신적 이완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정보사회는 정신적 고도 긴장의 시대를 열고 있다. 정보의 본질이 다름 아닌 놀라움의 자극이기 때문이다. 


p24

이들은 스마트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명령이나 금지로 작동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침묵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마트한 지배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의견, 필요, 선호를 소통하라고, 삶을 서술하라고, 게시하라고, 공유하라고, 링크로 걸라고 요구한다. 이 때 자유는 억압되기는 커녕 철저히 혹사된다. 


p37

오늘날의 정보 쓰나미는 우리를 최신성에 도취된 상태로 추락시킴으로써 서사의 위기를 악화시킨다. 

정보는 시간을 잘게 토막 낸다. 시간은 현재의 좁은 궤도로 단축된다. 여기에는 시간적 폭과 깊이가 없다.

'업데이트 강박'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p38

문제풀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서사만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희망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어준다.  


p46

오로지 순간만이 중요하다. 스냅은 '순간적 현실'의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그도 드럴 것이 스냅은 잠깐 지나면 사라진다. 현실이 스냅으로 쪼개진다. 

...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 플랫폼의 '스토리'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어떠한 서사적 길이도 보이지 않는다. ... 사실상 이들은 빠르게 사라지는 시각적 정보에 불과하다.


p47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스냅챗 같은 디지털 플랫폼은 이야기의 영점에 위치해 있다. 

이들은 이야기 매체가 아닌 정보 매체다. 서사적으로가 아닌 첨가적으로 작동하다. 


p49

이야기는 사건의 선택과 연결에 기반한다. 즉, 선택적으로 진행된다. 

이 서사의 길은 좁다. 선택된 사건만이 이야기에 동원된다. 

#

순간과 지속 개념을 통한 정보 가치에 대한 이야기. 

인지는 모두 환유적/선택적이다. 문제는 그것이 다른 정신공간/체험/과거를 불러내느냐 여부다. 


 p51

인공지능은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소망과 선호에 접근할 수 있다. 

데이터 기반 심리정치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 의식적 층위로 가기 전의 행위를 점령할 수 있다. 

... 퀀티파이드 셀프quantified self의 모토는 '숫자를 통한 자기 이해'다. 이것의 신봉자들은 

이야기, 기억, 성찰이 아닌 계산과 숫자를 통해 자기 이해에 도달하려 한다. 


p53

경험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재생할 수 있다면 엄밀히 말해 더 이상 기억은 불가능하다. 

... 기억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전제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 간격 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면,

즉 가용한 상태라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p58

로캉탱 "인간은 항상 이야기하는 사람이며 자신과 타인의 이야기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목도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도 보고, 삶을 자신이 이야기한 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존재이나, 그러나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느냐, 이야기하느냐를 말이다."


p60

전근대에는 삶이 이야기 속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시대에는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식으로 나열되는게 아니라 

부활절, 오순절, 크리스마스 식으로 그 단위가 구성되었다. 요일마저도 서사적 의미를 띠었다. 

가령 수요일은 오딘의 날, 목요일은 토르의 날인 식이다. 

#

인지의미론이 말하는 역할보다 고유한 값을 가졌던 시대. 동일성이 아닌 차이가 드러나던 방식.


p64

최적화는 기능 아니면 효율에만 해당하는 프로세스다. 

이야기는 내재적 가치를 지녔으므로 최적화가 불가능하다. 


p65

포르노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이 사소한 것에 집중하는 동안 포르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p70

사건들 사이에 강한 관계를 형성하는 이야기는 텅 빈 채 흘러가는 시간을 극복하게 한다. 

이야기하는 시간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야기할 능력의 상실은 '우연성'을 

더 많이 경험하게 한다. 그러면 허무와 우연성이 강해진다. 


p71

"어제는 학교에 있었어요. 첫 시간에 수학을 배웠고 그다음 시간엔 독일어와 생물, 

그다음엔 체육이 두 시간 있었어요. 끝나고 집에 왔고 숙제를 했어요. 그리고 잠시 컴퓨터를

하다가 자러 갔지요." 그의 삶은 외부의 사건들로 정해진다. 

그에게는 사건들을 내면화하고 이야기로 엮어내고 응축시키는 능력을 부여하는 내면성이 없다. 

#

최근 학생들 대부분의 글쓰기가 이렇다. 

피상적이고 정보만 나열하며, 자신이 배제되어 있다. 

자신을 드러내라고 강조하지만 왜 내 '수업'만 이러는지 불만이 많을 듯 하다. 


p78

현사실성과 서사성은 상호 배타적이다. 

세계가 탈신비화되면 모든 세계관계가 인과성으로 축소된다. 

... 모든 것을 인과성으로 설명하는 전체화는 '세계 빈곤'과 경험 빈곤을 초래한다. 


p80 

사진은 기억 이미지와 달리 서사적 내면성이 없다. 사진은 주어진 것을 내면화하지 않은 채로 모사한다.

사진은 의도하는 바가 없다... 사진과 달리 기억은 자의적이고 불완전하게 선택된다. 


p84

이야기는 완결성이 특징이다. 즉 종결형식이다. 

"이야기는 결말, 완결, 결론을 지향하고, 

정보는 본질적으로 항상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파편적이라는 점이다." - 수전 손택 susan sontag

p85

이야기는 빛과 그림자,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가까운 것과 먼 것의 유희다. 

투명성은 모든 이야기에 근거하는 이러한 변증법적 긴장을 없애버린다. 


p95

얼굴은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대이지, 가용한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손가락으로 어떤 사람의 사진을 터치하거나 심지어는 옆으로 밀어버릴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이 이미 시선, 즉 얼굴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p97

스마트폰 때문에 우리는 허구의 자아를 유지시키는 거울 단계에 잔류한다. 

...디지털은 현실을 해체하고, 공동체적 가치와 규범을 체화시키는 모든 상징을 허구의 것을 위해 점차 사라지게 한다.


p101

크리스 앤더슨 chris anderson "이론의 종말"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위에 관한 모든 이론은 옛것이 되었다. 

분류체계, 온톨로지, 심리학마저 전부 잊어라. 

인간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 데이터만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면, 숫자가 알아서 말해줄 것이다."

p102 

빅데이터는 사실상 설명하는 것이 없다. 빅데이터에서는 사물들 사이의 상관관계만이 파악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관관계는 지식의 가장 원시적인 형식이다. 상관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없다. 

빅데이터는 사물이  그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인과적 맥락도, 개념적 맥락도 생성되지 않는다. 

'어째서'가 '개념이 결여된 그것이 그렇다'로 완전히 대체된다.


빅데이터와 반대로 이러한 질서는 우리에게 지식의 가장 고차원적 형식, 즉 이해를 제공한다. 

이는 사물을 개념화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종결 형식이다. 반면 빅데이터는 완전히 열려 있다

종결 형식을 띤 이론은 사물을 개념적 틀에 담은 후 그것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론의 종말은 결국 정신적 개념과의 작별을 뜻한다. 

인공지능은 개념 없이도 작동한다. 지능은 정신이 아니다.


p107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지각을 가능케 한다."


p130

이제는 서사가 상업에 의해 본격적으로 독점되고 있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이야기 공동체가 아닌, 소비사회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서사는 마치 상품처럼 생산되고 소비된다. 


p134

이야기는 가령 존재에 관절을 삽입하는 것과 같다. 그럼으로써 삶에 방향과 지지를 제공한다. 

반면에 스토리텔링의 생산물로서 서사는 오히려 정보의 특성을 많이 띤다. 

정보처럼 덧없고, 임의적이고, 소모적이다. 삶을 안정시킬 힘이 없다. 


p136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 animal narrans 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은 나의 감상, 밑줄도 나의 관심사를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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