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며
풍요와 행복함이 우리를 감싸는 추석 명절이면, 나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면서 가라앉는 막연한 그리움에 몸서리를 친다. 애잔함과 안타까움, 서글픈 감정이 뒤섞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은 추석도 아닌데 이 끝도 없이 밀려오는 보고픔과 아픔의 파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멍하게 먼산을 바라보다 기억 속 저편으로 빠져든다.
이십 대에 접어든 나는 내 나이대의 젊은이들과 달리 늘 궁핍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직장에서도 잔뜩 주눅이 든 채 웃음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다가온 J가 있었다. 늘 유쾌하고 밝아 보이는 J는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와 장난도 치고,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 그야말로 슬기로운 직장생활을 전수해준 고마움 그 자체였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어느새 마치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하루의 반 이상도 더 머물러야 하는 직장에서 행복감을 느끼며 일하지 않으면 오래 버티기 힘들다며, 너스레를 떨던 J의 유머러스함과 천진난만함은 지금도 나에게 미소를 짓게 한다. 나이답지 않게 늘 명랑하고 활기가 넘쳤던 J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것을 받았던 나는 그녀가 상당히 부유한 집안의 딸인 줄로만 알았다. 내가 J의 집에 처음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말이다.
친해지다 보니 J의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처음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좀 의외였다. 털털한 성격에 비하여 깨끗하고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집안 살림들, 거기다 그냥 평범한 주택 단칸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으니 부유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야 했다. 이브닝 근무를 마치고 밤늦게 J의 집에 간 그날 치맥을 시켜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를 풀면서 그녀의 형편 또한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었다.
서른을 눈앞에 두고 있는 J에게는 거동이 불편한 연로하신 노모가 한 분 계셨고,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하나뿐인 오빠는 사업 실패와 가정불화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 방치된 조카아이들의 양육비와 노모의 병원비까지 부양해야 하는 J의 딱한 사정도 나와 별반 다르지는 않아 보였는데, 매번 받기만 한 내가 너무나 미안하기만 했다. 그런 내게 J는 조카들도 중요하지만, 동생은 더 소중한 존재가 아니겠냐며 나를 다독였다. 그 이후 그녀와 나는 친언니 그 이상으로 더욱 가까워졌고 서로를 의지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J는 내게 좀 작은 개인 병원으로 이직을 해야겠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너무나 하고 싶었던 작가의 꿈을 이루고 싶다며, 곧이어 야간대 국문과에 입학을 했다. 경제적 부담감은 좀 늘었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돼서 행복하다는 J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남자 친구는 없었지만, 남자 친구보다 더 사랑하는 산악 등반이라는 것이 있었다. 산악 등반은 J를 현실의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주는 일종의 지지대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산악 등반으로 몸과 마음을 굳건하게 지키며, 맹훈련을 해 나갔으니 말이다.
추석을 보름 앞두고서 J에게서 들뜬 목소리로 연락이 왔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로 등반을 가게 되었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하고 구입하기 위해 함께 동행해 줄 것을 요청하는 전화였다. 사실 산악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도움이 될리는 없었고, 장비를 골라 달라는 것은 출발하기 전에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핑계였다. 여하튼 우리는 종로에 들려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고, 밥을 먹으며 차를 마시는 등 평소에 하지 못했던 사치를 좀 부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마음이 편하지를 않았다.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나들이가 온통 회색 빛으로 먹구름이 낀 것 같은 묘한 양상이었다. 그냥 멀리 간다니 드는 공연한 불안감인가 하면서도 안정이 되지를 않았다. J도 눈치를 챘는지 본인도 갑자기 몸이 안 좋은 거 같아서 살짝 고민은 되지만, 평소에도 늘 즐기는 산악 등반이고 2년간이나 고된 훈련을 했는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냐며 웃어넘겼다.
그날 그렇게 살가운 만남을 가진 우리는, 차마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섰다.
J가 부푼 꿈을 안고 출국하던 날, 근무가 있어 배웅하지 못한 나는 여전히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떠난 지 며칠이 지나고, 연락을 한다던 J에게서의 연락은 도통 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추석이 되어도, 귀국할 날짜가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연락이 없었다.
나의 초조함과 긴장은 극도에 달했고, 그러던 중 그녀의 오빠라는 사람 한 데서 연락이 왔다. 난생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는 J의 사망 소식과 함께 나에게 부탁을 남겼다. 한 참이나 수화기를 멍하니 든 채 넋이 나가버린 나는 그만 눈물 대신에 웃음이 나왔다. 슬픔의 한도가 지나치니 어이없는 웃음밖에 남지 않았나 보다.
J에게는 가족조차 단출했다. 결혼도 안 했기에 오빠와 어린 조카들, 그리고 차마 죽음을 알릴 수 없는 노모만이 존재했다. 나는 J오빠의 부탁으로 그녀를 만나러 공항으로 갔다. 그렇게 씩씩하고 튼튼했던 J는 한 줌 재가 되어 내 손에 쥐어졌다.
함께 했던 대원들로부터 내가 전해 들은 이야기는 고산병으로 뒤쳐져 실종되었다가, 시신을 발견해서 뒤늦게 돌아오게 되었다고 했다. 2년이 넘는 기간 고난도의 훈련을 했던 그녀가 고산병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조차 믿기지를 않았고, 의문점도 많았으나 이미 재가 되어 왔으니 그 어디에서도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내 손으로 J를 흙으로 돌려보낸 그날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못 나가게 더 말리지 못한 죄책감과 함께, 든든한 조력자를 잃었다는 슬픔은 나를 더욱 슬프고도 침묵하게 만들었다. 지금 유난히 밀려드는 그리움과 애잔함에 감정이 북받쳐 하염없이 눈물 방울이 볼을 타고 내린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J 그녀의 생일이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난 그녀를 잊을 수가 없나 보다.
‘행복을 그리는 철학자’ 앤드루 매튜스(Andrew Matthews)의 “정녕 마지막인 것만 같은 순간에 새로운 희망이 움튼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태양이 어김없이 솟듯, 참고 견디면 보상은 반드시 있다”란 말이 떠오른다. 정말 J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마지막인 것만 같았는데, 나에겐 다시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그녀가 이루고 가지 못한 꿈을 이루어주고 싶어졌다.
남아있는 나의 생명을 사랑하고, 더 이상 도를 넘는 슬픔으로 시간을 낭비하지만은 않으리라.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의 멋진 등반기를 쓰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J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꿈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그리고 그 책을 이젠 내 마음속 별이 된 J에게 선물할 것이다. 아득히 머나먼 하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J를 생각하며 오늘 그녀의 생일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