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첫 단편소설집 ‘부재중 고백’을 출간하였다.
친구는 발행된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책을 우편으로 보내주었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일상화된 무기력함 때문에 선뜻 책을 열어보지 못하고 책상 위 한 모퉁이에 고이 올려놓고는 책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언젠가는 꼭 읽어보리라는 기약 없는 다짐을 입 안으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미루고 미루다 마감일 전 벼락치기로 숙제하듯, 드디어 첫 장을 열어젖혔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서 책 표지 한 장을 넘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문장들은 나를 친구가 설계한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하여 마지막 장까지 단숨에 나를 인도하였다.
첫 장의 이야기는 남성들로 가득한 직장에서의 여성 생존기 같은 이야기로써, 성인지 부족을 넘어서 한 인간으로서도 환멸을 느끼게 하는 수준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 시대에서 일하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나도 20년이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성적 희롱과 차별을 받아왔기에, 책을 읽어가며 구토증이 올라오곤 했다.
두 번째 장부터는 엄마와 딸, 모녀간의 이야기이지만 세상의 일반적인 모성애의 상식을 파괴하는, 나르시시즘 엄마를 둔 딸의 이야기이다.
세상이 온통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가야만 하고,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서 오는 고통, 쥬이상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자식들에게 폭언을 함으로써 쾌락을 느끼는 기괴하면서도 병리적인 사람이 엄마일 때 펼쳐지는 난장 스토리들이다.
내 어린 시절도 성숙하지 못한 부모님 때문에 얼룩져 있기에, 성숙하지 못한 인간이 부모로서 행사하는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소설 속 어린아이의 모습에 격렬하게 감정이 북받쳐 오르며 현기증까지 느끼기도 했다.
‘부재중 고백’의 이야기들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화되지 못한 아픔은 토해놓아야만 살 수 있다.
토악질은 나를 아프게 한 이들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그저 내가 살고 싶다는 외침이며, 나를 살게 만드는 응급조치이다.
토해 놓은 토사물은 누군가에겐 역겹고, 거북하고, 불편할 수 있지만…
토해낼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기도 하고, 카타르시스를 대리 만족케 하는 역할도 하곤 한다.
나는 겁쟁이이기에 저항하지 못했고, 누적되는 멜랑꼴리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부재중 고백’은 그런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대신해 세상에 까발리는 용기 있는 고백이다.
용기 내어 고백하는 모든 가여운 영혼들에게 뜨거운 위로와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