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은 아씨들’(2019)은 그레타 거윅의 작품이다. 이 작품의 지적인 대사들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최고를 꼽는다면 ‘반영하되 부여한다’였다. 소설 원작자인 루이자 메이 올콧이 실제로 작품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감독이 자연스럽게 연결시켰다는 거, 관객이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는 게 중요하다.
루이자 메이 올콧은 특이한 집안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초월적 공동체에 헌신한 교사이자 사회 사업가이다. 집에는 에머슨, 호손, 소로 등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집안분위기가민주적이거나 소통이 원활했던건 아니었다. 가족들은 30년 동안 20번이나 이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부모의 경제관념은 희박했고 가족들은 늘 궁핍했던 것으로 보인다. 너무나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그녀는 어려서부터 온갖 일을 전전해야 했다. 가정교사, 가정부, 간호사 등 돈벌이를 위해 일터로 내몰렸다. 금욕적인 집안 분위기, 종교, 사회적 공상적 공동체의 영향 때문인지 그녀에게는 결혼도 자연스러운 통과 의례가 아니었다.
‘작은 아씨들’, ‘소공자’, ‘소공녀’, ‘플란더즈의 개’ 등은 어린 시절 익숙했던 세계 명작이다. 그렇듯 ‘작은 아씨들 Little Women’도 자매들의 우애를 다룬 아동 소설로만 알고 있었다. 덕분에 이 영화를 통해 루이자 메이 올콧이라는 진지한 작가를 알게 되어 때늦은 감탄을 했다. 원작자 올콧은 뜻밖에도 어두운 폭력물, 하드코어 공포물을 쓰는 대중 작가였다. 이런 작가였으니 아동물 특히 소녀들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으리라. 가난한 아버지의 책도 함께 내준다는 출판업자의 권유로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장편이다. 1부는 잘 알려진 ‘작은 아씨들’(1868)이고 2부는 죽은 베스 외세 자매가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이야기인데 ‘작은 아내들 Little Wives’(1869)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작은 아씨들’도 그렇지만 ‘작은 아내들’이라는 제목도 요즘 분위기와는 동떨어진다. 올콧은 제목을 통해서 시대와의 타협점을 모색하려 했을 것이다. 19세기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썼던 이디스 워튼이나 헨리 제임스의 인물들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 그때는 미국인들도 관습에 눌려 답답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으니까.
올콧의 아가씨들은 예쁘고 귀여워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나 불협화음이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고 순결해야 한다. 그 시절 여자들에게 부과된 사회상을 반영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 보니 작품의 내용은 당연히 실제보다 낙관적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반자적적인 이 소설에서 조를 결혼시킨다. 게다가 부자 고모까지 있어서 유산으로 저택을 상속받게 한다. 세 자매와 남편들은 그 집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안학교를 운영한다. 작가가 원하는 방식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올콧은 결혼하지 않았고 부자 고모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전업 작가이자 여성과 아동을 위한 사업에 앞장을 선 인물이다. ‘작은 아씨들’ 1부 조의 모델이 있다면 바로 작가 자신일 터이다.
1부를 보면 조는 독립적인 여성이다. 올콧 역시 재미있는 소설, 잘 팔리는 소설을 궁리했을 것이다. 그 당시 여자들이 바라는 행복, 독자들이 원하는 재미를 소설에 드러내려 노력했다. 이 작가에 대해서 알고서야 영화 후반부가 그 후에 전개될 내용을 예고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화는 조 마치와 실제 인물 올콧을 평형 배치해 끝부분을 메타 소설로 진행한다.
당시 여자들에게는 남자가 필요하다. 물려받은 재산없다면 여자 혼자는 먹고살 수 없는 구조다.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한다. 그것도 이왕이면 돈 많은 남자하고 해야 한다. 올콧이 대단한 건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났다는 것. 이 작가는 거금이 들어오는 선금이 아니고 작은 지분이라도 지속적으로 들어오는 인세를 요구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부양했을 뿐 아니라 미래 여성들의 지위까지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고 계약도 했다.
작품은 작가의 신념을 담아 사회사업으로까지 범위를 확장한다. ‘작은 아씨들’의 후속편인 ‘작은 신사들’(1871)과 ‘조의 아이들’(1886)은 조 부부가 운영하는 학교의 교육관을 담고 있다. 이 학교는 초월주의, 공동체주의 등을 통해 페스탈로치나 헨리 소로 등의 철학관, 교육관을 실천한다. 부모를 통해 경험한 공동체의 철학을 담아 학교를 세우고 그것을 소설 속에서 운영한 셈이다.
영화에서 초보작가 조는 자신의 작품이 단지 현실을 ‘반영’할 뿐이라고 말한다. 스스로의 역량을 인정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체념한 모습이다. 이 말을 들은 씩씩한 여동생 에이미는 의미심장하게도 쓰고 싶은 걸 쓰라고 한다. 현실의 장벽에 항복하지 말고 오히려 자꾸 다루라고 충고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서 세상이바뀌도록 의미를 ‘부여’하라는 뜻이다. 이게 올콧 또는 그레타 거윅의 의도일 것이다. 어렵고 필요한 일, 주장하고 싶은 건 자꾸 알려야 한다. 쓴다는 건 대단한 무기이므로.
‘반영하는가, 부여하는가?’ 누구든 생각할 거리가 있다고 본다. 특히 창작자들은 이 문장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문학 작품은 사실 특별한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작법 자체가 인물이 영향을 발휘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는 달걀로 바위 치기를 되풀이한다. 굳센 바위는 대부분 인간을 얽매는 제도, 종교, 관습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작품은 저절로 예언하고 권유한다. 독자에게 스며들어 생각하게 하고 행동하게 한다. 행동하지 않더라도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도 한다. 그런 면에서 작품은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에 충실하다. 그래서 펜이 검보다 강하다는 거 아닐까.
작가들만은 아닌 것 같다. 누구든 세상을 반영하고 동시에 무언가를 부여한다. 아무리 작아도 무언가는 있겠지. 유전자를 전달하는 것도 우리의 위대함과 평범함을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도킨스 같은 사람은 진 gene 대신 밈 meme을 전파한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은 작은 단위지만 누구든 세상을 위해 기여하는 게 있으리라.
누군가를 피상적으로 바라보면서 단지 현실에 반응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적당하게 타협한다고 함부로 오해했었다. 그 사람들에게 큰 실례를 했다. 두드러지는 이들은 눈에 띄게 부여한다. 반면 대부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반영하고 무의식적으로 부여한다.
점점 자기 합리화에 신경쓴다. 존재 이유에 대한 스스로의 자기 위안 같은 거다. 정신 승리라도 없다면 허우적거리다 사라진다는 건데 이게 두려워서라도 이유를 찾아 헤맨다. 자신을 합리화하기. 이게 부여할 내용이다. 그레타 거윅의 대사에 쿵하고 자극을 받는다. 일단 살고 있다면 내 삶을 합리화해야 하고 그 타당성을 바로 두 단어로 나타낸다. ‘반영’하되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