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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Jul 22. 2023

누구네 집이든 비밀 하나쯤은

이지은 '비밀의 언덕',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이지은 감독의 ‘비밀의 언덕’(2023)을 보았다. 귀여우면서도 맹랑한 소녀가 작은 거짓말들을 쌓았다가 허무는 이야기다. 누구든 공감할 데가 있는 영화다.   

   

명은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다. 아이는 가족들이 창피하다. 부모의 직업, 가치관, 행동거지 모두 위선적이고 부도덕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애써 가리고 숨기느라 주위를 거짓말로 채운다. 한번 시작한 거짓말은 멈추기가 어렵다.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부모에게는 늘 냄새가 난다. 이들에게는 배려나 예의라는 낱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망신스러운 부모. 그들이 남들에게 알려지는 게 수치스럽다. 부모는 이 아이 입장에서 보면 낙제점이다. 멋진 가정의 행복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친구들에게는 다른 남자를 아버지 사진으로 대체해 앨범을 꾸미고 직업도 마음대로 바꾸어 자랑한다. 엄마는 가정에 헌신적인 전업주부가 된다. 교양 있는 엄마,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좋은 엄마로.      


가족, 이 안에는 뭔가 있다. 예전에 샤를리즈 테론이 누구네 집이든 해골 하나쯤은 감춰져 있다고 말한 인터뷰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녀 집안에는 어머니의 남편 살해라는 악몽이 드리워져 있었으니까. ‘비밀의 언덕’을 보면서 유진 오닐(1888~1953)의 ‘밤으로의 긴 여로’(1956)를 기억해 냈다. 출구가 안 보이는 검은 밤 같은 희곡이다. 가족이 서로에게 품고 있는 증오와 연민은 집을 감싸고 흐르는 안개처럼 끈질기고 고통스럽다.    

  

유진 오닐은 노벨문학상, 퓰리처상, 토니상 수상자다. 남부럽지 않은 경력에 화려한 인생을 살았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1941년에 완성했지만 죽을 때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후 25년간은 출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오닐의 가족 이야기를 거의 사실대로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가는 가족을 치부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당부는 지켜지지 않아 죽은지 3년도 안 되어 출판, 공연되었다. 한 작가가 인생의 거의 마지막이라 할 작품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오닐이 어떤 식으로 생각했건 이 희곡은 그의 최고 작품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작품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아버지, 어머니, 큰아들, 둘째 아들. 상황은 이렇다. 아버지 타이론과 장남 제이미, 막내 에드먼드는 알코올 중독이고 어머니 메리는 약물 중독이다. 믿을 수 없게도 한 집안이 모두 심각한 중독자 신세다. 그렇다 보니 자세히 살펴볼수록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펼쳐질 밖에.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사연 없는 이가 없고 공감하지 못할 일도 없다.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갈등으로 비비 꼬인 이 사람들이 같은 집 식구라는 데 있다. 이들의 대화는 서로를 찌르고 상처 내고 비틀어댄다. 서로를 끔찍하게 증오하다가 가여운 존재임을 깨닫는다. 남이라면 무시하거나 지나치겠지만 가족은 한집에서 매일 봐야 한다. 풀 수 없는 갈등, 비극, 애증이란 이런 거다.     

 

타이론은 한때 인기 있는 미남 배우였다. 그가 무대에 나타나면 관객들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그가 출연한 셰익스피어나 뒤마의 극은 호평과 함께 돈과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다였다. 그에게는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버티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가출했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잔인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타이론 역시 어린 시절부터 세상 풍파에 시달려왔다. 이 남자의 최고 가치는 ‘돈’이다. 예술을 비즈니스로 바라보는 배우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 후로는 계속 내리막길 삼류 배우로 살아왔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폭군이나 다름없다. 돈 앞에서는 사랑이나 자비심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아픈 아내는 돌팔이 의사에게로 보내 지속적으로 엉터리 처방을 받게 했다. 그 결과 메리는 약물 중독자가 된다. 자식들에게도 모질고 가혹하다. 큰아들에게는 늘 폭언을 휘둘러댄다. 그는 작은아들의 폐병 진단에도 아랑곳하지 않아 그저 저렴한 요양원을 찾기에만 급급하다. 그가 제일 두려워하는 건 허름한 양로원에서 돈 없이 죽는 거다. 주변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대하다 보니 남은 이들이 없다. 고독은 술로 달랜다. 아침부터 밤까지 마시긴 하지만 자신이 알코올 중독임은 부정한다. 화가 나서 한잔, 우울해서 한잔. 그렇게 세월이 간다.  

    

메리는 50대. 젊어서는 대단한 미녀였다. 어린 나이에 타이론을 만난 게 운명을 바꿨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소녀는 사랑에 빠져 결혼이라는 모험에 뛰어들었다. 타이론은 순회공연으로 호텔과 호텔을 전전한다.  아이는 타이론의 순회공연 중 부모도 없이 죽었다. 아직껏 이 여름 별장 외에는 집도 없어 늘 떠돌아야 하니 정착을 원하는 메리는 늘 불안하다. 게다가 수전노 남편 때문에 마약 중독자가 된 지도 오래다. 요양원에 들락거리는 아내를 향해 남편은 의지 부족이라고 비난한다. 그녀는 심리적으로도 약에 푹 빠져있다. 마약만이 자기에게 평화와 안녕을 가져다준다고 여긴다. 그래도 메리는 자신이 중독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슬그머니 사라져 모르핀을 주사하는 걸 아는 가족들의 마음은 참담하다. 그녀는 자기 연민과 자식들에의 회한으로 하루하루 시들어 간다. 그녀는 제이미의 타락도, 에드먼드의 폐병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삶을 직시하지 못한다.     


이런 부모를 둔 두 아들은 말할 수 없이 불행하다. 큰아들은 예술가의 낭만적 기질을 타고났지만 몸과 마음이 모두 황폐하다. 돈만 있으면 사창가로 달려가 현실을 잊으려 한다. 가족 중에서도 가장 처절한 지옥을 사는 인물이다. 에드먼드는 문학 소년이었지만 지금은 폐결핵을 진단받았다. 미래가 암울하다. 그의 어두운 상황을 돕는 가족은 없다. 부모는 병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나약하다고 비난한다. 형은 동생을 은근히 질투하고 미워한다. 부모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희곡은 아침, 점심, 저녁, 밤의 4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이 말하듯이 밤으로 끝난다. 이 가족에게 아침은 오지 않을 것이다. 4막의 마지막은 의미심장하게 끔찍하다. 모르핀에 취한 메리는 젊은 자신의 절정이었을 결혼식 웨딩드레스를 들고 나타나 피아노를 친다. 제이미는 스윈번의 시를 나지막이 읊조린다. ‘우리 모두 일어나 헤어지세/그 여인 모르나니/큰바람인 양 우리 모두 바다로 나가세/휘날리는 모래와 거품 이는 바다로/우리 여기 있어 무엇하리/인간만사 그러하듯 모든 게 허사인데/이 세상 눈물인 양 애달프다/세상사 어떤지 보여주어 무엇하나/알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여인……’     


오닐의 가족은 ‘밤으로의 긴 여로’에 나오는 인물들과 거의 흡사하다고 한다. 아버지는 타이론이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양로원에서의 가난한 죽음 대신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곧이어 어머니는 뇌경색으로 삶을 마감했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제이미의 죽음이 제일 비극적이다. 부모와 형은 1920년대 초반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 죽었다. 이 경험은 유진 오닐의 가슴에 깊은 슬픔을 남겼을 것이다.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으로 삶을 소진하고 있었던 오닐은 자기 집안의 이야기에 몰두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오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무릅쓰고 썼다'라고 자평했다. 희곡에 나온 대로 인물들의 자학과 자조는 운명이었을까. 오닐 가족의 비극은 그 후로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녀를 세 명 두었는데 큰아들은 알코올 중독으로, 둘째 아들은 약물 중독으로 고생했다. 둘 모두 자살로 내렸다.      


'비밀의 언덕’의 명은이는 그런대로 가족과 화해한다. 어린 마음에도 부모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아마 부모도 아이의 거짓말을 눈치챘을 테니 어느 정도 자정작용이 있지 않았을까. 서로서로 고쳐나가는 집이여, 복도 많구나. 한지붕, 한가족 늘 깨가 쏟아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은 못 보는 체 용서하며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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