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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Apr 17. 2024

그것은 잘못된 권위였다

오리엔탈리즘

최근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오리엔탈리즘’(1978)을 읽었다. 이제는 쓰이지도 않는 용어인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상세한 비판서를 참 늦게야 접했다. 읽다 보니 동양학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편협과 그 편집광적 아집이 굳건한 권위를 획득하는 과정 그리고 권위가 알려주는 대로 사고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다른 현상들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출간되면서부터 연구자들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포스트 식민주의의 논의도 이 책을 기점으로 등장했을 정도라 한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굳건한 사고체계를 뒤흔든 셈이다.      


사이드는 영국 지배하의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이집트에서 성장하고 미국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동방과 서방 사이의 문화충돌을 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영국식 이름을 가지고 개신교도로 미국에 정착했으나 자신이 동양인이라고 하는 문화적 현실, 동양인으로서의 역사적 구조화에 속박되어 있음을 잊은 적이 없다. 특히 1967년의 3차 중동전쟁은 미국민들 사이에 반이슬람, 반 아랍 정서를 확산시키는 중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은 그 자신이 오래도록 몰두했던 질문과 답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동양인을 비하하는 유럽인들의 평가를 만날 수 있다. 이 사실을 의식한 걸까.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의 서술 방식은 지독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서 누구든 글의 흐름을 반박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는 오래도록 서양인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해 왔다. 심정적으로는 서구의 첫 문학 작품인 호메로스의 ‘일리어드-오디세이’부터 등장한다. 일리어드의 트로이인들이나 오디세우스가 싸우던 지중해 괴물들은 이민족이었을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부인, 자신들의 사고나 종교에 도전한 인물은 지옥에서 천벌을 받아야 한다. 1320년에 완성된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의 지옥편에 나오는 마호메트의 모습은 끔찍하기 짝이 없다. 몸이 두쪽으로 나뉘어 창자까지 튀어나와 있다. 서양인들에게 동방은 낯설고 이국적인 상대이자 야만을 품은 타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강력한 적은 필요악이다. 적은 자신들을 하나로 묶을 힘, 그 집단적 관념을 부여해 주었다.     


사이드는 주요 식민지 열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후발 주자였던 미국에서 출간된 사료만을 텍스트로 삼는다는 것, 아랍과 이슬람 세계만을 오리엔탈 지역으로 선택한다는 점을 명시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그는 ‘문제 설정’을 위해 텍스트를 특유의 기준으로 제한한다. 선택한 텍스트는 전략적으로 위치를 설정하고 편성한다. 이를 통해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초기 저술들에서부터 추고와 조정에 의해 사실이 날조되었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있는 그대로 묘사가 아닌 조작으로서의 동방이 표상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이런 연구 방법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이 역사적 문화적 상황 안에서 인간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허울뿐인 가치임을 말하고 싶어 한다.     


18세기에 이르면 지리적 발견이 마무리되면서 서구인들의 이국 경험이 확대된다. 서구 또한 자신을 정의하려던 때이다. 스스로 정체성을 채워나가기 위해서도 상대자인 동양 탐구가 필요했다. 이런 시대적 요구로 서구인에 의한 동양이 만들어진다. 내가 아닌 타인 비추어 나를 증명하려 한다. 오리엔탈리즘은 있어도 악시덴탈리즘이 없는 이유다.      


이러한 경험의 폭은 과거 동방과의 역사적 대결의식을 이끌어내면서 비교 연구를 촉발시킨다. 오리엔탈리즘의 성립은 18세기 사상가들의 역사철학이 타 문명과 비교와 대조만이 아닌 공감적 동일화를 강조하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인류 보편적인 공감대 형성의 욕구에 더해 자연과 인간을 분류하려는 당대 실증주의가 큰 기여를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타자와의 공감 형성이 마련되면서 인류 연대라는 보편적 정통성까지만 확보되었다면 19세기 이후의 역사는 달라졌을 거이다. 그러나 시대를 휩쓴 헤게모니는 권력에 의해 타자를 재정의, 재구성, 재배치하는 틀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19세기 이후, 종교와 문화를 달리하던 그 문명은 강제로 개방되면서 열강의 피식민지 국가로 종속된다. 나폴레옹은 소문과 신화, 온실 속 아카데미의 영역이었던 동방을 군사적으로 점령(1798)해 그 실체를 보여준 첫 인물이었다. 이로써 오리엔탈리즘은 ‘학문의 영역’에서 ‘존재론적, 인식론적 구별에 기초를 둔 사고 스타일’로, 최종적으로는 동양에 대한 진술에 권위를 부여해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조화하고 동양에 대한 권위를 갖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로 나아간다. 오리엔탈리즘은 식민주의, 제국주의와 깊은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유럽은 세계의 1차 대전 말까지 세계의 85%를 식민지로 차지한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학문은 발생부터 편협을 내포하는 운명을 지녔다. 대표적인 예가 실베스트로 드 사시나 에르네스트 르낭과 같은 초기 연구자들부터 시작된 중심부의 위치 설정이다. 문헌학이나 언어학으로부터 촉발된 관심에서 중심의 위치는 늘 유럽이었고 동방은 비교의 대상에 머물렀다. 비교의 대상이라는 것도 실험실에 머문 화석화된 단면을 관찰한 결과였다. 동양인은 야만성, 기괴성, 방종성을 지닌 자들이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수세기 동안 바리케이드를 치고는 동양인들이 서양인과 일대일 정면으로 대결할 자질을 갖추지 못했음을 설파했다. 그것이 그들의 전문 영역이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에 대하여 표면상 적합하다는 여러 가지의 요청, 관점, 이데올로기적인 편견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규칙화된 작품, 비전, 연구의 양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양은 자기를 스스로 표현하지 못했다. 대신 ‘어떠한 독특한 방법에 의해 가르쳐지고, 연구되고, 관리되고, 판단되어왔다’. 그 주체는 당연히 진보적인 백인 서구인이고 그들의 관리 대상은 정체 상태로 수 천 년을 머물고 있다고 판단되는 아랍인, 셈족의 동양인이다.  


 이런 왜곡된 틀 속에서 ‘동양은 서양의 학문, 서양인의 의식, 나아가 근대에 와서 서양의 제국 지배 영역 속에 동양을 집어넣는 일련의 총체적인 힘의 조합에 의해 틀이 잡힌 표상의 체계’를 형성한다.’ 열강의 제국주의자들, 학자들, 저자들은 동방이 서구에 비해 인종이나 문화가 열등하며 수동적이라고 은밀하게 속삭여 왔다. 정치적 목적이 있는 지식인뿐 아니라 여행기, 소설, 르포르타주 작가들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일단 표상이 된 체계는 상호텍스트성의 힘을 발휘하며 권위를 덧입힌다.     


그러나 사이드가 책을 쓰면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중동 지역에는 기존의 고정관념이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것 같다. 최근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비극적인 사태가 진행되는 상황이다. 작년 10월 이래로 가자지구에서만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제 상황도 초토화된 지 오래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보내는 공감대는 크지 않다. 어쩌면 서구권의 아랍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종차별주의, 정치적 제국주의, 반인간적 이데올로기의 그물망에 갇혀 있다. 미국이 압도하는 세계 질서는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의 덫에 갇혀 있다.      






오스만 파묵의 소설을 읽어왔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 ‘내 마음의 낯 섬’이다. 이 책의 중심 내용은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변천사에 다름 아니다. 작가는 1960년대 이후 2010년대까지 이 도시의 성장 그리고 도시민들의 취향 변화 등을 묘사한다. 중간중간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 왜 이걸 읽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만일 유럽이나 미국 도시의 변천사 같았으면 더 관심을 기울였을 것 같다. 반면 오스만 튀르크의 옛 수도는 관광지로나 관심이 있지 실제 거주지는 관심 밖이었다.


나 역시 강자들의 삶이나 그들의 도시에 관심이 많아서이다. 수 세기 동안 세계 주역이었던 이들, 한 마디로 백인들의 사고방식, 그들이 지은 멋진 건물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의 문학도 더 소중해 보였다. 문학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작고 소외된 사람들을 비추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파묵이 그렇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르키예 사람들의 지리멸렬한 삶은 내 영역 밖에 두고 싶었다. 팔레스타인이나 예멘, 시리아, 사우디 아라비아에도 얼마나 위대한 작품들 그리고 작가들이 많을까. 그렇지만 그들의 문학은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늘에 묻혀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을 읽다 보면 서구 중심의 우리 교육, 사고방식이 얼마나 일방적이었는지 알게 된다. 강자가 마련해 둔 텍스트를 읽고 또 읽고 중심부화 시켰기에  그리고 나머지는 주변에 위치시켰기 그렇다. 그것이 현실의 지배적인 표상이 되었다. 거기에 종속되어 있다면 자신이 얼마나 편협한지조차 깨닫지 못한다. 나도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잘 알고 실천하는 식민주의자 중 하나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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