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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May 04. 2023

행복한 미개인

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 존 쿳시 '포'

존 쿳시의 ‘포’(1986)는 기존 이야기에 가상 리얼리티를 덧붙인 소설이다. 여기서 포는 ‘로빈슨 크루소’(1719)를 쓴 작가 대니얼 디포를 뜻한다. 소설 ‘포’는 권력의 형성 과정을 보여준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말과 글로 이루어진 문명의 위계 역시 생각하게 한다.       


외딴섬에 백인 로빈슨 크루소와 흑인 프라이데이가 다. 우리가 아는 대로 크루소는 고독하지만 자유롭고 프라이데이는 노예나 다름없다. 이곳에 수전 바턴이라는 여자가 표류해 온다. 프라이데이와 바턴은 크루소에 비해 팀에서의 유용성이 떨어진다. 크루소는 의문을 제기받지 않는 인물이다. 아집과 잔인성을 갖춘 제왕에게 감히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섬을 탈출하지 않는 것 같다. 섬의 완벽한 주인이기 때문이다.   

  

크루소는 오랜 노동으로 거대한 밭을 일군다. 엄밀하게 말해서 밭 비슷한 땅이다. 섬에 한 톨 씨앗이라도 있을 리 없다. 씨를 심을 수 없는 밭 모양의 평지. 단지 인간의 습속으로 인해 심을 것도 없지만 땅을 고르고 정리한다. 한낮의 열기에도 돌멩이를 들어내고 잡초를 뽑아내며 밭을 고른다. 인간인 이상 원시림을 두고 볼 수 없는 걸까. 숲은 농지로 정리되어야 하고 농지에서는 곡식이 자라나야 한다. 자연은 인간의 의지대로 해석되고 순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문명을 의미한다는 듯. 자연을 소유하려는 자는 인간도 지배하려 할 테지. 크루소는 백인 남성 제국주의자의 전형적인 발걸음을 암시한다.   


이 소설 속 프라이데이에게는 혀가 없다. 노예 상인들이 잘라버렸다고 한다. 턴은 크루소가 그렇게 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둔다. 주인 ‘아니다’라는 말을 원하지 않는다. 크루소는 프라이데이에게 묻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크루소는 명령하고 프라이데이는 순종한다.


의사소통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게 뭔지나 알까. 보통 명사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추상의 세계는 더 말할 나위 없다. 프라이데이는 ‘말을 할 수 없기에 자신을 재구성하는 것에 대해 방어할 힘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다. 남들이  식인종이라고 부르면 식인종이라고 여겨져야 한다. 바턴은 프라이데이와의 소통을 위해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나 어느 순간 프라이데이가 사람과 관계 맺기를 원치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다. 타인과의 관계는 주종관계에 불과할 것임을 희미하게나마 인지하는 거다. 자신이 약자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강자와 화음을 맞추고 싶지 않다. 차라리 홀로 도취 상태로 지내는 게 최고라고 판단한 걸까. 그는 혼자 춤추고 노래하고 꽃을 뿌린다.      


바턴이라는 여자는 미스터리한 캐릭터다. 자기가 알려주고 싶은 것만 말하기에 독자들은 그녀의 신분, 지난 행적을 짐작만 할 뿐이다. 그녀는 18세기 인물이기에 ‘세례, 결혼, 그리고 장례식만이 여자들의 이유 있는 외출’ 임을 잘 알고 있다. 자유 여성은 창녀로 취급된다. 바턴은 자유 여성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그녀는 지배받는 자의 슬픔을 다. 프라이데이는 바턴과 동일 인물, 그녀의 그림자나 마찬가지다. 소수자끼리의 연대감이라 할까.  바턴이 프라이데이로부터 ‘섬의 소리’가 쏟아지는 걸 듣는 건 당연하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누구든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혼자 있는 외톨이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늘 권력관계를 동반한다는 괴로운 진실도 여전하다. 사람 사이는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더욱이 공동체의 필요에 의한 효용성에 기댄다면 평등이란 더욱 요원한 일이다. 인간의 불평등을 기원부터 밝힌 장 자크 루소의 글을 읽어본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동물과 문명의 어느 사이. 본능과 이성에 따라 홀로 자기 몸이나 보존하던 시기에 주목했다. ‘원시 상태의 무위와 우리 이기심의 극성스러운 활동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인간 기능 발달 시기’이다. 그는 이때를 인류사의 가장 행복하고 안정된 시기로 꼽는다. 이 시기를 벗어난 것은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불행한 우연 때문이다. 루소는 이 ‘우연’ 이후 인류는 개선이 아닌 종의 쇠퇴를 맞이했다고 주장한다.     

 

그 우연이란 게 뭘까? 바로 타인과의 협력이 발생하는 순간을 말한다. 이 시기 사람들은 ‘협력이 필요 없는 기술에 전념하면서 본성이 허용하는 만큼 자유롭고 건전하고 선량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며 계속해서 상호 독립적인 상태에서 교류의 평온함을 누렸다.’ 그러나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 평등은 사라진다. 미개인에게 선악 개념이나 자기 보존에의 불안이 생기면 타인과의 협업이 필요해지고 불평등이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가족이 형성되고 구별이 생겨나면 일종의 소유 개념이 나타난다. 인간은 점차 잉여 물자에 대한 탐욕, 소유욕, 인정욕구를 충족시키려 하고 우월감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부유하고 강한 사람은 심지어 죽어서도 존경받을 권리를 누리려고 한다.      


다음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2부 첫 부분이다. 지금 잣대로 아랫글을 읽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최초의 그 욕망덩어리들이 문제였구나. 그때 제대로 했더라면 오늘날 ‘파멸, 비참, 공포’도 덜 했으려나.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 주었을 것인가.     


소유와 노동은 숲을 농지로 바꾸었고 수확물은 강자와 약자의 힘에 맞춰 분배된다. 금속과 농업생산물이 문명을 가속화시켰다. 토지 경작은 토지 분배를 낳고 소유와 정의에 대한 규칙도 만들어진다. ‘포’에 나오는 로빈슨 크루소가 허망하기 그지없는 밭 가꾸기에 집착한 것도 일리가 있다. 그는 문명인이다. 토지 점유가 반복되면 인간 소유로도 전환되기도 쉽다는 걸 안다.

     

내가 지은 농산물, 홀로 씨름해서 잡은 물고기로 배를 채우고 자연에서 얻은 풀이나 가죽으로 몸을 두른다면 남에게 의지할 일이 없다. 분업도 협업도 필요 없는 삶. 북 치고 장구치고 웬만한 일은 혼자서 다 한다. 물론 먼 먼 옛날에나 있었던 일이다. 지금은 산속에서 산다는 사람이라도 온전히 자신을 부양하지 못한다. 가끔은 고기나 생선을 먹어야 하고 옷, 플라스틱, 비닐, 병 등도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하다.    

  

사람은 타인과 소통하려는 존재고 여럿이 모여야 삶을 유지한다. 그러자면 남에게 쓸모가 있으면 좋다. 어떤 식이든 유용한 존재는 공동체 내에서 대우받는다. 불평등을 향한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이로써 허영심과 경멸이 태어났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치와 부러움이 생기니까. 만일 재능의 양과 질이 동등하다면 사람들 간 부의 평등이 가능했을까.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들은 적은 있지만 알다시피 불평등하다. 자연적 불평등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새로운 원인 결합이 등장한다. 기술, 재산, 부와 같은 환경 차이는 오래도록 지속되면서 사람들 간의 차이를 더 뚜렷하게 만든다.     


소유욕은 질투심, 경쟁, 대항을 불러일으켜 이익을 도모하게 한다. 아쉽게도 재산을 잃는다면 지배를 받거나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과 약탈을 선택하기도 한다. 한번 남을 지배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 다른 쾌락을 무시하게 된다. 그래서 부자들은 기존의 노예로 새 노예를 얻고 이웃을 정복하려 한다. 소유의 권리가 힘의 권리로 전환되면서 평등이 깨지고 무질서가 초래된다. 이후로는 부유한 자의 횡령, 가난한 자의 약탈, 모든 이들의 정념이 자연적인 연민이나 약한 정의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인간들을 인색하고 야비하고 악독하게 만들었다. 황폐해졌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얻은 것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자니 생각이 복잡해진다. 어느 정도 수긍하는 면은 있다. 초기 인류는 ‘15 소년 표류기’와 ‘파리 대왕’의 사이 어디쯤 아닐까 한다. 억압과 고독 중 무엇이 나을지 생각할수록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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